다시 또, <내가 보면 질까봐>
2010.06.23 21:39:38 조회472
<2006년 월드컵 당시 중앙일보 '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에' 에 실렸던 글>
내가 보면 질까봐...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 내가 보면 웬지 질 것 같아 TV 중계를 거의 보지 않는 편이었다.
2002년! 그해에는 기적 같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통에 열광의 도가니에 어쩔 수 없이 휩쓸려 스스로 만든 징크스를 깨고 말았다. 그때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 이후 슬금슬금 스포츠 중계를 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월드컵의 계절이 왔다. 4년 전의 행복했던 기억 때문에 이번엔 더 조바심이 났다. 토고전은 그래도 용감하게 끝까지 중계방송을 다 보고 역전의 기쁨까지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전부터는 또다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경기 시간이 잠잘 때라는 사실이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그냥 잊어버리고 잠에 빠져버리자 했는데 눈이 저절로 뜨였다.
오전 5시20분. '6시쯤 끝난다니 나중에 결과나 봐야지' 하면서 잠을 다시 청하는데 갑자기 옆집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TV를 켰다.
몇 번이고 다시 보여주는 동점골의 환희가 화면을 후끈 달구고 있었다. 눈가에 아직 달려있던 잠을 확실히 털어버릴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온 나라 온 국민이 16강 진출에 대한 꿈을 품고 기다리던 대스위스전이 드디어 다가오고 내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알지 못하는 사이, 승리에 대한 소망이 내 마음에 근심거리로 무겁게 자리 잡았다.
'너무 승부에 연연하지 말고 그냥 축구를 즐기자'
마음을 다스려 봐도 소용없었다. 그날도 나는 절대로 새벽에 깰 생각이 없었고 지건 이기건 내일 아침에나 눈을 뜨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자정이 넘도록 잠은 안 오고 가슴이 콩닥거렸다. 어찌어찌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누가 깨운 것처럼 화들짝 잠이 달아나 시계를 보니 겨우 오전 4시 20분. 아뿔싸 지금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 다시 자야 해. 나는 잠을 청했다. 그러나 조바심이 사정없이 살아나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그래도 tv를 켜지 않았다. 내심 지난번처럼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를 기대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가끔 희미하게 안타까운 탄식 소리만 들려왔다.
어쩌다 잠이 들었던가 보다. 무슨 내용인지 모를 꿈을 한참 꾸는데 기다리던 함성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tv를 켜자. 그런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꼼짝을 할 수 없다. 잠결에도 생각을 해보니 그건 바로 꿈속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나는 여전히 꿈속에 있었고 그 새벽, 함성은 영영 들려오지 않았다. (2006. 6. 30일자)
어젯밤, 운동을 하고 온데다 낮부터 김치냉장고를 들인 뒷 마무리가 어찌 고되던지 모든 일이 12시가 넘어야 끝났다. 잠자리에 들면서 이제 세시간 후면 또 우리 선수들이 16강에 대한 부담과 기대를 안고 뛰겠구나. 그래도 나는 자야지 했다. 얼마나 잤을까, 난데없는 함성 소리에 잠이 깼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앗차 축구...
학사관에는 삼십 여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산다. 밤문화가 일상인 그네들이 중계를 보며 지르는 환호 소리였다.
웬만 하면 다시 잠이 들 법도 한데 그만 정신이 말짱해졌다. 한 골 넣었나보다. 시간은 4시가 넘어 있었다. 그래도 TV를 켜지 않았다. 조금 더 자야 내일 일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애써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리 긴 간격을 두지 않고 계속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들의 높은 소리는 때로 찢어지는 천처럼 가팔랐다.
그 소리의 장단 고저는 보지 않고도 내용을 짐작하게 했다. 음, 아쉽게 골문 앞까지 갔다가 골로 연결되지 않았군, 어떤 탄식 소리는 상대방이 기어이 골을 넣었다는 신호로 들려왔다. 환호와 함성이 길게 이어지면 골인이요, 올라가다 꼬리를 흐리면 실패였다. 잠이 완전히 달아날까봐 TV도 켜지 않으면서 머릿속에서는 혼자 그림을 그리며 누워 있었다. 게다가 내가 보면 또 질 것만 같아 궁금함을 참고 있었다.
우리 팀이 싸울 때 축구 경기의 시간처럼 길고 더디 가는 시간이 또 있을까. 분명 골인을 기뻐하는 환호 소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더디 가고 있었다. 그대로, 환호 소리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이어서 들려오는 탄식 소리는 결코 듣고 싶지 않은 것을...
'Look at me'
다섯 시가 넘었는데 느닷없이 문자 메시지 신호음까지 울린다.
'드디어 16강 진출! 기분 너무 좋아요'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이겼든지, 비겼든지 아무튼 16강 진출이라면 또 한 번 가슴 졸일 일이 남은 셈이다.
그래도 관문을 하나 넘었으니 이제는 그냥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4년에 한 번씩 치르는 이 즐거운 홍역도
다음에 또 겪을 수 있을까 싶은 것은 이제 곤두박질 치는 내 세월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