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고 있는 일터에는 후배가 몇 명 있다.
그녀들이 후배인지도 몰랐었다.
K, 그녀는 평소에 내가 좀 뜨악해 하던 인물이었다.
현금이 잔뜩 든 지갑을 흘리고 다니지를 않나
한 번은 은행에서 돈을 인출한 후 카드만 빼고 돈은 그대로 놓고 왔다고
징징대지를 않나
대화를 할 때면 미국 사람처럼 말꼬리를 올리며
'으흠, 으흠' 해대는 바람에 느끼해서 속이 뒤틀릴 때도 많았다.
내가 속으로 그녀를 좀 거시기 한 눈으로 보거나 말거나
가끔 집에서 삼각김밥을 만들어 가져오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모시는 대장님을 위해 늘 홍삼을 다려오는 바람에
내 일을 한 몫 거들어 주곤 했다.
말은 안했어도 어찌어찌하여 나의 출신학교를 알게 된 사람 중 누군가가
K도 그 학교 출신이라고 일러주었다.
'오잉? '
나는 속으로 찔끔했다. 표시는 내지 않았지만 늘 무언가 흘리고 다니는 그녀를
그다지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나왔다면서요?'
'저요,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했었어요'
내가 묻자 그녀는 내가 선배인 줄 알고 있었다면서 쑥스럽기도 하고 무언가 항변이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또 속으로 찔끔했다. (내가 자기를 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사람에게 이심전심이란 것이 있는 걸 내가 깜빡 잊었었나보다. 말 안해도 전해지는 분위기,
그러니 아무리 그렇더라도 속으로 좋지 않은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또 한 사람의 후배는 전공은 아니지만 한국화를 그리며 문화교실에서 한국화를 가르치기도 한다.
가정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지만 품위를 잃지 않고 야무지게 산다.
일전에 동인들과 전시회도 열어서 선배된 도리로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가 몇 기인줄 잘 모른다. 동창회 활동이 없어서일 것이다.
지난 주일에 얼굴이 동그스름하고 귀여운 소녀가 사무실에 복사하러 왔다.
언젠가 그 아이의 아버지인 분이 내게 자기 딸의 선배라고 아는 척을 해온 적이 있었다.
'옳거니, 이 녀석이로구나'
불쑥 아는 척을 해봤다.
"합창대회 했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선배들 찬조도 있었지?"
"저희 선배님이세요?"
"그래 아빠가 얘기 안 하시던?"
이야기는 몇 마디 더 오고 갔는데 문득 나는 과연 선배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근사한 전문직도 아니고 이 나이 되도록 일하면서 사는 내 모습을 후배들은 어떻게 볼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배는 그냥 선배가 아니다. 무언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 진정한 선배가
되어야 할텐데 싶었다.
아마 그 깨달음은 나의 모습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이제 그럴듯한 그 무엇이 되기는 틀린 터, 이 자리에서나마 빈틈없고 성실한 모습을 보일 수만 있으면
그래도 선배답지 않을까?
섣불리 선배라고 나선다는 게 어째 좀 주저되면서
선배라는 단어가 갑자기 무겁게 다가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