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왔다.
이번 겨울호는 한참 늦게 발간이 되어 그랬는지 많이 기다려졌고
책을 받아드는 마음이 사뭇 떨렸다.
손선생님의 수필작법 강의를 듣기 전에는, 아니 듣고 나서도 오래동안
등단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수필을 쓰고 싶어 모인 사람들이라 등단했다는 이들도 많았지만
내게 그런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배우면서도 하면 할수록, 쓰면 쓸수록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글들이 등단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작품은 못되는 것 같았다.
초회추천이 된 작품도, 추천완료된 작품도 내게 있어서 회심의 역작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단지 그동안 써놓았던 글을 배운대로 다듬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수필가의 이름을 달기에는 아직 멀기만 한데 잡지에 사진도 실리고
보잘것 없는 약력도 소개되었다.
어쩐지 부끄러웠다.
마음이 느끼는 일들, 눈으로 보기만 하기에는 무언가 미진한 아름다운 것들,
듣고 지나치기에는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소리들, 삶의 각양각색 다른 모습들,
이제는 풍화되어 하얗게 바랜 채 아픔없이 추억할 수 있는 지난 날들이
자꾸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든다.
그 욕구를 감당할 만큼 내 식견이나 견문은 넓지 못해서일까, 섬광처럼 스치고
사라지는 어떤 성찰의 순간을 잡아내지 못해서 늘 허기가 진다.
소녀시절, 어려운 환경에도 나는 스스로 피난처를 만들었었다. 마음은 꿈과 동경에
부풀었지만 현실은 언제나 어두웠다.
그럴 때마다 숨을 곳이 필요했다. 책과 예수님이었다. 어려서는 책을 많이 읽었다.
책을 읽을 때 마음이 충만했고, 읽을 책이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리고 주일학교 시절에 접하게 된 예수는 그후로 교회에 다니지도 않았으면서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부정한 여자를 사람들이 돌로 치려 할 때 그 소란 속에서도 아무 말없이 땅에 무언가를
쓰시던 예수님이 누구든지 죄없다고 생각하는 자,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던 성경구절은
어린 마음에 너무 깊게 새겨져 버렸다.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군중 속에서 초연했던 분, 그리고 한 마디로 그 소란을 잠재운 분,
그분이 좋았다.
지금 나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때와 같은 감격을 누리지 못한다. 책도 그때처럼 열심히 읽지 못한다.
덕분에 읽다 만 책들로 내 방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여전히 읽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아서
그렇게 옆에 쌓아놓고는 읽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혼자 숨어 들고 싶은 곳이 필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내게 숨을 곳 하나가 더 생겼다. 글쓰기는 혼자만의 비밀정원을 가꾸는 작업과도 같다.
정원에 크고 화려한 꽃은 없다. 작고 여린 보잘것 없는 꽃들이지만 나는 그것들이
훨씬 좋다. 혼자 좋아하는 일은 좀 우스운 것 같아도 대단히 편안한 일이다.
또 객관적으로 나는 가진 것이 매우 적은 사람이다. 다행히 마음은 가난하지 않아서 삶이 풍요한 편이다.
쓰는 일은 그 풍요함에 가장 큰 플러스 알파가 되어줄 것이다.
쓰는 일을 즐길 수 있도록 달란트를 허락하신 위에 계신 분께 감사를 멈출 수 없다.
쓰는 일도 그렇게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