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겐 나이트클럽
2010.02.06 16:21:21 조회903
아침에 세수하다 느닷없이 그 일이 떠올랐다. 단편적으로 생각나는 장면들이었다.
어두운 조명을 받으며 움직이는 군상들, 번갈아 들려오던 음악-블루스와 고고의 리듬, 그리고 새벽 희끄므레한 빛속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고 서있던 나, 나는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내 주위에 둘러선 수상한 남자들, 그 중에는 맨몸에 가죽자켓을 입고 가슴팍을 훤히 드러내며 지퍼를 깊이 내린 남자가 서 있었다.
벌써 삼십여 년 전 일이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대구에 내려가 살고 있던 친구가 왔다. 하루를 같이 놀고 밤이 되었다. 친구가 갑자기 나이트 클럽엘 가자고 졸랐다. 춤을 즐길 줄 알고 신명이 많은 친구지만 그와 정반대였던 내가 선뜻 따라나설 리가 없었다. 모처럼의 해방된 시간이 아까웠던지 친구는 마치 남자가 그러하듯 나를 강제로 떠밀며 나이트 클럽으로 들어갔다.
보통의 경우, 나이트 클럽엘 간다 하면 좋지 않은 눈으로 볼 게 뻔하지만 친구를 잘 아는 나로서는 그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서 못이기는 척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였는데 그 집에 가면 아이들과 춤추는 친구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신나는 음악이 나오자 친구와 아들 딸이 약속이나 한 듯 거울 앞에 서서 보는 사람은 아랑곳 없이 열심히 춤을 추던 모습은 참 놀랍기도 했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몸치인 나도 음악을 들으면 절로 몸이 흔들리고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지만 숫기가 없어서 실행하지 못하는 일을 그 가족들은 예사롭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친구가 정말로 춤 추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뿌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꾸러기가 밤에 잠을 안 자고 춤추는 곳엘 갔으니 큰일이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춤을 못 추니 구경이나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싶어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되냐?"
"염려 마, 고고는 그냥 적당히 흔들면 되고, 블루스가 나오면 그냥 자리에 앉아 쉬면 돼"
그 말만 던지고 친구는 플로어로 나갔다. 조명이 번쩍이는 가운데 친구는 벌써 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무대에는 최헌과 무슨 나비라던 그룹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한바탕 몸을 풀고 친구가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음악이 빠른 템포로 바뀌자 친구는 무료히 앉아있는 나를 억지로 끌어내 플로어로 나갔다. 멈칫거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모두 자연스럽고 신나게 흔들고 있으니 나만 바보스러웠다. 평소에 음악에 맞춰 저절로 까딱거리던 몸짓 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몸놀림이 하도 어색하니 친구가 몰래 웃었다. 진땀이 났다. 다시 자리에 와 앉아 있는데 웨이터가 오더니 어떤 신사분이 내게 춤을 청했으니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 춤 못 춰요"
질겁을 하며 거절했지만 그런 곳에서는 거절이 매너가 아니라며 한사코 권했다. 할 수 없이 모르는 남자 앞에 가서 섰다.
"춤 못 추는 것, 봐서 다 알고 있어요, 가만히 선율에 맡기고 제가 리드하는대로만 따라오세요"
아닌게 아니라 음악에라도 마음을 빼앗긴다면 뭐가 될 듯 싶은데 내 귀에는 전혀 음악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니 어쩌랴. 한없이 어색하고 거북하기만 했다. 점점 뻣뻣해지는 나를 눈치챘는지 드디어 그가 항복을 했다.
"정말 안되겠군요."
겨우 풀려나 자리에 앉았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갑자기 웬 청년이 내 앞에 와서 앉았다. 몸에 딱 붙는 가죽잠바를 입은 품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억지로 춤을 췄는지 안 췄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같이 나가자고 한 말은 얼마나 무섭던지 잊혀지지 않았다.
우리는 몰래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가 춤을 추러 나간 사이 친구와 나는 샛문 쪽으로 슬슬 움직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똘마니 같은 일행들이 있어서 이미 그쪽을 지키고 있을 줄이야. 어쨌든 그 녀석들에게 에워싸인 나는 기가 막혔고 온갖 불길한 생각이 다 들었다. 망신살이 뻗친 건 자명한 일이구나 싶으니 앞이 캄캄했다.
"왜 이러는 거예요, 난 서른이 넘은 사람입니다. 다른 데 가서..."
"서른 살 아니라, 할머니라도 좋아요. 나는 댁과 같이 가기로 맘먹었으니까..."
궁색한 나의 애원에 그 청년은 한 마디로 잘랐다.
(이 녀석이 왜 내게 이러는 걸까, 내가 쉬워 보이나?)
같이 간 내 친구는 누구나 돌아볼 정도의 미모가 돋보였는데 왜 평범한 나를 찍었을까 ,속으로 무척 의아해 하면서 친구를 찾으니 어디로 사라지고 안보였다. 저 혼자 도망갔나 싶어 더 기가 막혔다. 새벽 하늘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꼼짝없이 일을 당하게 생겼구나 싶어 입술이 바싹 바싹 타들어갔다.
갑자기 건물 쪽에서 일단의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나이트 클럽 직원들이었다. 내 친구가 침착하게 위기를 알렸던 것이다.
내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같은 장면의 주인공이 되었던 순간이 벌어지고 있었다.
클럽 직원들이 나를 가로막고 빙 둘러서서 그들에게 타일렀다.
"저희 집에 온 손님입니다. 곱게 보내주시지요"
일촉즉발, 잘못 하다가는 난투극이라도 벌어질 듯 싶은 긴장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처음엔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날을 세우던 그 녀석들도 숫적 열세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직원들이 손짓으로 내게 어서 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움직여 친구와 나는 죽어라 뛰었다. 직원들이 막아주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어찌나 뒷꼭지가 땡기던지 충무로 대로까지 쉬지도 않고 내달렸다. 그 와중에도 훤히 보이는 길은 피하자 싶어 아무 골목이나 찾아 들었다.
날은 완전히 밝았다. 우리는 해장국집을 찾아 들어 목도 축이고 그제야 쓰려오는 속도 달래며 마음을 놓았다.
"야, 왜 너 아니고 나였을까?"
"니가 너무 순진하게 생겨 그래, 그런 애들은 순진한 여자를 좋아하거든"
"???"
위기를 벗어났다 싶으니 그제야 그 장면들과 클럽에서의 일을 되짚어 보며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만나기만 하면 할 이야기가 많았던 우리 사이 아닌가. 사건 하나가 더 생겼으니 오죽하겠는가.
우리 인생이란 위기를 벗어날 때마다 삶의 역사가 쌓이고 얘깃거리가 생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잘 벗어나기만 하면...
그 후로도 한동안 가죽자켓 입은 젊은 남자만 보면 가슴이 쿵 내려앉곤 했다.
지금도 가끔 퇴계로를 지날 때면 처음이자 마지막 가봤던 무겐 나이트 클럽이 생각난다. 난생 처음 겪었던 미수로 끝난 납치 사건과 더불어.
참, 그때 이 몸치를 난생처음 나이트엘 데려가고 또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게 해 준 친구는
우리 17기 동기인데 다늦게 라인댄스 강사 자격증을 취득해 추고 싶은 춤, 싫도록 추고 있다.
나이든 제자도 수월치 않게 많은 것 같은데 지리상 멀어서 유감스럽게도 나는 제자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