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석봉근 선생님
2009.10.21 17:25:25 조회705
얼마 전 울산에서 열리고 있는 양궁세계선수권대회에 대한 뉴스를 보았다. 화면을 통해 오래 전에 우리를 열광시켰던 금메달리스트들의 면면을 보며 그때의 감동을 떠올리는데 김수녕 선수가 특별히 반가운 것은 오래 전에 그녀를 만난 적이 있어서일 것이다.
몇 년 전인지 확실한 셈은 할 수 없지만 40대 후반쯤 되어서였을 것이다.
어느 날 친구가 전화를 했다. 당시 매스컴을 탔던, 그리운 사람을 찾아주는 어떤 단체에 의뢰해서 선생님을 찾아보자는 제의였다.
활달하고 명랑하며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였다.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러자고 해놓고 나는 직장생활을 하니 접수나 필요한 모든 절차는 친구에게 일임했다. 얼마 후 친구가 들뜬 목소리로 선생님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연락을 해왔다. 석봉근 선생님은 아직도 양궁계에 종사하고 계시며 어디에 계신지도 다 알아놓았다는 것이다. 친구들도 만나면 궁금해 하던 '석방구' 선생님을 다시 보게 되다니 은근히 가슴이 뛰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선생님은 괴팍하고 고집이 셌으며 쉽게 기존질서에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언제나 아웃사이더처럼 외로워 보였다. 보통은 늘 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했던 것 같다. 텅 빈 운동장에 놓인 책상에 오래 엎드려 계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마 그 책상은 무언가 기록을 하기 위해 갖다 놓은 것이리라. 정교사가 아니어서인지 교무실에도 자리가 없었지 싶다.
작은 키에 매부리 코, 불분명한 발음, 그리고 무서워 보이면서도 어딘지 장난스럽고 시니컬한 태도가 그 선생님을 더 외로운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봉근이라는 이름 때문에 학생들에게서 석방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자신의 싸인이라고 소개하면서 칠판에 둥근 호 두 개를 붙여 그려 옴팍 들어간 부분에서 가스를 내뿜는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림 솜씨가 뛰어났던 분이었다. 동문이라면 누구나 오래도록 그 분을 기억하고 궁금해 해왔던 참이었다.
뜻밖에도 우리가 스승을 찾는다는 정보를 입수한 KBS TV 방송국에서 스승의 날 기념 프로그램으로 우리를 취재한다는 연락이 왔다. 일이 커진 셈이었다.
우리가 찾는 석선생님은 중학교 시절 체육선생님이었다고 하니 방송국 사람들은 이슈가 될 것 같다고 더 좋아했다. 40대 여인들이 찾고저 하는 중학교 시절 은사라... 그림이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약속한 날 방송국 차에 실려 선생님이 계시다는 안산 양궁장으로 향했다. 선생님을 만날 일에 앞서 그 과정들이 모두 가슴 뛰는 일이었다. 그 당시 안산은 막 조성된 시가지여서 조금은 삭막하고 공터도 많았다. 바람이 세찬 날이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자 일단의 선수들이 활쏘기 연습에 한창이었다. 선수 외에 진행요원들도 다수 있었다. 드디어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구나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방송국 사람들이 우선 진행요원들과 섭외를 하고 있었다.
보통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특이한 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제자라고 인사를 해도 선생님은 무반응이었다. 게다가 방송국측 사람들의 취재요청도 막무가내로 거절했다. 무언가 단단히 배알이 뒤틀린 표정으로 분위기가 험악하기까지 했다.
가만히 지켜보니 선생님은 양궁계의 원로가 되어 계시지만 언제나처럼 비주류의 설음 속에서 살고 계신 것 같았다. 실제로 젊은 요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도 우리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선생님은 아웃사이더였다. 선생님을 설득하는 임무가 우리에게 떨어졌다. 그래도 제자가 나서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친구와 나는 없는 아양까지 부리며 옛날에 선생님이 우리를 얼마나 예뻐하셨는지를(사실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호들갑스럽게 상기시키며 한참을 졸랐다. 방송국 사람들의 낭패는 우리보다 더했다.
넓은 양궁장에는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사정없이 날리고 시간은 자꾸 가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사정을 하자 드디어 선생님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방송국 콘티대로 인터뷰도 하고 선생님에 대한 추억담도 풀어놓으며 사진도 찍었다. 아마 그때도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베드민턴이나 양궁을 들여오고 보급한 사람은 우리 선생님인데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 계시는 분이라고...
마음이 열린 선생님은 우리에게 무슨 자료 사진 같은 것을 나누어 주셨다. 그 사진들은 대개 양궁이나 경기장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태극기를 한반도 모형으로 늘어놓고 찍은 사진들이었다. 무슨 기념이 될 만한 장면들은 아니었지만 모두 코팅까지 해서 빳빳했다. 우리는 지나치게 고마워하면서 그 사진들을 받았다. 그 사진들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김수녕 선수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과 선생님을 모시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얼마나 바람이 세차게 불었는지 사진속사람들의 모습을 기괴하게 바꿔놓았다. 선생님의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은 산산히 흩어져 있고 내 주름치마는 완전히 두 다리의 실루엣을 다 드러내며 휘감겨 있었다.
우리는 방송국 차를 얻어 타고 영등포까지 나왔다. 저녁식사를 대접하러 식당엘 들어갔는데 친구가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다고 가버리고 나자 혼자 선생님을 상대하기가 난감했다.
어색함을 모면하려고 된 소리 안 된 소리 하다가 직장 전화번호를 묻기에 알려드렸다.
얼마 후 직장 근처로 선생님이 찾아오셨는데 좀 이상한 말씀을 하시기에 다음엔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았다.
다시 시간이 좀 흐른 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안 좋았다. 그때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마음이 바쁘셨을까? 저물녁의 쓸쓸함으로 그처럼 이상한 소리를 하셨던가 싶으니 좀 잘 해 드릴 것을 그랬나 싶기도 했다.
괴팍하고 외롭고 어딘지 비범했던 석봉근 선생님을 우리는 모두 잊지 못한다. 그 어떤 선생님보다도...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아셨다면 좀 행복해하지 않으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