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친구도 있었네...
2009.07.29 17:14:19 조회790
영화 '남과 여'의 주제곡을 들으면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언제나 무안 당한 사람처럼 벌건 안색에 멋적은 웃음을 흘리며 어눌한 말투로 엉뚱한 소리를 잘 하던 동창생 S다.
이십대 초반에 그녀를 오랜만에 버스 안에서 봤는데 느닷없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깜짝 놀랐다. 그 당시 상영된 영화 '남과 여'는 단연 우리들 화제의 단골메뉴였다. 그래도 그녀가 그 영화 이야기를 끄집어 낼 줄은 정말 몰랐다. 자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요점은 그녀도 사랑, 그런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간 보여준 그녀의 행적으로 보아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생각할 수도 없었던 모습이어서 더욱 놀랐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한 반이었고 같은 중학교에 지원을 했다. 그 시절의 기억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아니 두드러지게 남아있는 것도 없으면서 그녀가 식초를 항상 먹고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뼈를 유연하게 하기 위해 식초를 먹는다고 해서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그 친구가 혹 발레를 전공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입꼬리를 예각으로 한껏 치켜올리며 무슨 말이든 확신에 차서 했지만 그 내용은 항상 모두를 반신반의하게 만들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등하교를 한동안 같이 했다. 그 친구는 여전히 검붉은 얼굴에 알 수 없는 웃음을 띠우고 멋적고 자신없는 것 같은 표정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곤 했다.
중 2때였나보다. 어느날 그녀는 갑자기 면도칼을 내 교복 깃에 달린 학교 뱃지에 대며 엄숙하게 말했다.
'너, 이 다음에 유명한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그 전에는 너와 말하지 않겠어'
학교 신문에 내 글이 한 번 실려서 다른 반 아이들까지 나를 조금 알아보긴 했지만 유명한 작가라니 너무 엉뚱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전엔 나랑 말도 하지 않겠다니 더 우습기만 했다. 장난이려니 했다. 그런데 정말 그 친구는 나와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이들 말에 의하면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 모두에게 그처럼 이런 저런 이유로 결별을 선언했다는 것이었다. 치기 어린 그런 결심은 금방 무너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많은 아이들의 수근거림도 가라앉고 스스로 자초한 그녀의 고립은 길어졌다.
혼자 노는 그녀의 모습이 예사로워지긴 했어도 가끔 교실에서 풍금을 치며 높고 떨리는 목소리로 남의 시선도 아랑곳 없이 노래를 하는 모습은 늘 낯설고 이상했다.
그 고립된 생활은 그러나 친구의 성적을 부쩍 올려주었다. 때로는 1, 2등을 다투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어느 날 친구는 자살을 기도했다. 학교가 벌컥 뒤집혔다. 가사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그 아이하고 친했으니 그 아이 집엘 가보라는 것이었다. 겁이 난 나는 최근엔 가까이 지낸 적이 없다고 꽁무니를 뺐지만 소용없었다.
처음으로 상도동에 있는 그 아이의 집엘 가볼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 아이 옆에는 중년 남성이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는 얼굴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 핏발이 서 있었고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은 없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그는 학자였으며 철학이나 사상 서적을 많이 읽었던 탓에 딸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친구는 깨어났지만 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그녀가 남긴 노트에 선생님들을 경멸하는 내용이 많았던 것도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철학 서적을 많이 읽었던 친구는 세상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고 선생님의 가르침이 다 우습기만 했다는 것이다.
전체조회 때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있었다. 철학서적을 수박겉핥기식으로 읽어 올바른 사고를 갖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 사례였다는 것이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동숭동 서울대 교정에서였다. 나는 그때 문리대 교직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대에 입학을 했다고 한다. 어디에서고 눈에 뜨이는 촌스러운 차림에 그 알 수 없는 웃음은 여전했다. 공대에 교양학부가 있을 때여서 그녀를 자주 볼 수는 없었다.
아는 학생들이 내가 그녀와 동창이라는 사실을 알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가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더라는 이야기가 가장 뇌리에 남았다.
가끔 만나면 그녀는 거창한 이상이나 학문적인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연애를 한다고 자랑을 했다.
그런데 사귀는 남학생 앞에서 화장실을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잘 못된 것인가 내게 물었다. 자기가 거침없이 그런 말 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 남학생을 많이 좋아하는 눈치였다.
매사가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에 차 있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상식을 모른 체 살고 있는 친구가 이제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 전혀 익숙치 않은 사랑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기 시작했는데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아마 수없는 시행착오와 아픔을 겪지 않을까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그녀의 대화법은 늘 연극조의 과장된 것이었다. 안정감 없는 표정에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을 늘 띠고 있었다. 그냥 자기 세계를 가고 있는 것이라면 독특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사랑이란 얼마나 가변적인가.
그녀가 학교 선생이 되어 어느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끝으로 나는 그녀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가끔 궁금했고 '남과 여'의 주제가를 듣게 되면 그때 버스 안에서 나누던 그녀와의 대화가 생각난다.
그녀는 껍질을 깨고 사랑을 얻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