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사무실에 들어서면 우선 컴퓨터부터 켠다. 밤사이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로 서둔다. 그런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아직은 집에 컴퓨터를 두지 않았다. 집에서 만이라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될 것 같아서다.
사각의 모니터가 환해지는 순간 컴퓨터는 내게 세상으로 난 창문이 되어준다. 일하면서 수시로 세상을 읽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며 누군가와 소통도 한다. 그런 일들은 빠질 수 없는 일상이 되어버려서 간혹 고장이 나 잠시라도 그 창이 닫혀버리면 안절부절, 금단증세까지 생기곤 한다. 중독 치고 정도가 좀 심한 편이라고 할까.
우선 심어놓은 KBS FM ‘콩’을 클릭해서 음악을 듣는다. 우퍼 스피커를 연결해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떠올리면서. 좋은 음질로 듣는 아름다운 음악은 하루를 산뜻하게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다음은 메일을 확인한다. 그리고 내 블로그를 연다. 누군가 흔적을 남기고 갈 때도 있지만 거의 언제나 깨끗하하다. 혼자 즐기며 가꾸는 내 공간이기에 마치 나만의 비밀 뜨락을 거닐 듯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본다. 글만 있는 블로그는 삭막하다. 그림이나 사진을 곁들이기 위해 내 그림 파일은 퍼다 놓은 아름다운 사진들로 가득하다. 오늘은 또 무엇을 올려볼까 궁리하면서, 로그아웃.
그런데 미진하다. 카페 두어 곳을 들러본다. 안부인사라도 나누지 않으면 영 궁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중독이라면 중독이다.
어느 날 카페 문을 열고 로그인을 하자 쪽지가 와 있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공개적으로 남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개인적 연락일 경우에 쪽지가 온다. 그래서 쪽지가 하나 있다는 표시는 말할 수 없는 기대감으로 사뭇 마음까지 설레게 한다. 얼른 열어보았다. 온라인상에서 갖게 되는 교류다 보니 그 기대가 더 큰지도 모른다.
보낸 이의 닉네임은 '리턴'이었다. 리턴이라... 영화제목 ‘돌아온 쟝고’가 얼른 떠오른다. 내가 가입해 있는 카페에 그런 닉네임은 없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추억과 그리움에 관한 절절한 시와 노래가 두 편 들어있었다.
그대 마음 안에
내가 있어 외로웠다면
사랑으로 기억 했던가요
이렇게 시작된 한 편의 시와 오래 전, 젊은 시절에 자주 들었던 대중가요 <추억>의 가사가 실려 있었다. 시와 노래, 두 편 다 주제는 ‘그리움’이었다. 게다가 우리 나이쯤 되어 느낄 법한 회한과 아쉬움이 가득한 내용이었다. ‘사랑’ ‘외로움’ ‘그리움’...나는 그런 단어들을 잘 쓰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처음엔 그냥 생각 없이 읽었다.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이 무슨 조화 속일까. 꼭 내게 보내는 의미심장한 내용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막을 수 없는 내 인생의 노을은
자꾸만 다가오는데
초라해져 가고 있는 내 모습이
그대가 그리워하던 얼굴이었을까
시의 중간쯤에 이르러서는 마치 내 심정을 노래하는 것 같기까지 했다. 누가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런 시를 내게 보냈을까. 어쩌면 무작위로 보낸 것일 수도 있는데 너무 내가 덤비는 것은 아닐까 싶어 붕 떴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장난삼아 물음표 세 개만 찍어 답장을 보내고 말았다.
그 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알 수 없는 쪽지가 내 가슴에 일으킨 파문이었다. 잠깐 그리움처럼 스쳐가는 궁금증 끝에 그 '리턴'이라는 사람이 혹시 전에 알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부랴부랴 다시 쪽지를 읽어보았다.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은근히 부풀었던 기대가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되어버렸다.
그 후에도 가끔 익명으로 들어가지만 취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는 카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아는 사람과 교류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 추억을 공유한 적이 있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게시물을 대하게 될 때 특히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이 사람 혹시 내가 아는 사람 아닐까? 확인할 길은 없지만 잠깐씩 그런 생각이 들면 무미건조하던 시간이 갑자기 팽팽하게 긴장이 되면서 생기가 돌았다. 물론 한 번도 그런 기대가 충족된 적은 없지만 그런 상상을 하는 동안은 언제나 즐거웠다.
인터넷이 보편화 되고 카페나 블로그를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이버상에서 점멸하는 조명등처럼 때로는 아는 척을 하며 반짝이다가 슬며시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 경우를 본다. 행여 아는 사람을 우연히 길이 아닌 모니터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 참 재미있고 반가울 것 같기도 했다. 누군지 장난처럼 보낸 한 장의 쪽지가 그런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새삼스럽게 그리움이란 단어가 안개비처럼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것인지 어떤 시절에 대한 것인지조차 불분명했지만 싫지 않은 감정이었다. 어쩌면 이런 류의 그리움은 익명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픔도 없고 그늘도 없다. 잠깐의 호기심이지만 바람이 스쳐간 수면처럼 일렁이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 깜박이는 커서로 전하는 사이버에서의 인사, 익명의 쪽지 하나도 때로는 미세한 울림으로 그리움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소통의 도구로 존재하며 또 다른 형태의 관계를 형성해주는 매체, 사각의 작은 모니터 저편에서 누군가 내게 보내온 알 수 없는 손짓 하나에 생각은 실타래를 서리서리 풀어나간다.
어깨를 스치고도 모르는 채 지나가는 길 없는 그 길에서 오늘은 또 어떤 이의 그림자를 문득 보게 될까. 세상으로 향해 열린 나의 창, 모니터를 켜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