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상에 올린 잘 익은 파김치가 식구들을 즐겁게 했다. 남편은 파김치만으로도 밥이 술술넘어간다며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그런 남편에게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하려다가 바꾸어 말했다.
“당신이 파김치를 먹고 있는 모습은 꼭 누구를 닮았어.”
“ 누구?”
“있어.”
남편의 모습은 어릴 적 고향에서 잘 익은 파김치를 밥숟갈 위에 얹어 입이 미어져라 먹곤 했던 쾌산이 아저씨를 생각나게 했다. 아저씨는 보통키에 깡마른 체구였는데 가을추수가 끝나고 초가지붕 이엉을 올릴 때는 이집 저집으로 불려 다니던 일등 일꾼이었다. 특히 지붕 꼭대기 이음새를 정확하게 덮는 작업은 동네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우리집에 파김치가 익은 날이면 그 분은 예외없이 우리랑 한 식구처럼 밥을 같이 먹었다. 고봉밥을 앞에 놓고 빨갛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파김치를 밥숟갈 위에 한가득 얹어 먹었는데, 파김치가 넘치도록 올려진 그 큰 숟가락이 입 가까이로 가면 아저씨의 입이 하마 같이 벌어졌다.
그 분의 숟가락을 보고 있던 내 입도 함께 벌어지고 아저씨가 우적우적 씹을 때까지 다물어지지 않았다. 다 먹고 난 입주위엔 뻘건 파국물이 묻어 있었다. 그걸 손으로 쓰윽 문질러 닦고 나서 뜨거운 숭늉을 후후 불어 한사발 마셨다. 어머니는 파김치를 담그는 날이면 유난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익으면 쾌산이 아저씨가 참 잘 먹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린 나는 ‘엄마가 아저씨를 위해 파김치를 담그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보리밥에 반찬도 특별한 것이 없으면서 어머니는 식사 때마다 매번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곤 했다. 당시 우리집은 측백나무를 심어 울타리로 삼았는데 나무가 커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나무 사이로 다 보였다. 식사 중에 누군가가 지나가면 어머니는 울타리 너머로 큰 소리로 불렀다.
“영식이 아버지, 아직 아침식사 전이면 여기 와서 한술 뜨고 가슈”
영식이 아버지가 사양하는 경우에도 어머니는 사립문을 나가서까지 억지로 데려와 기어이 한 그릇을 비우게 했다. 영식이 아버지는 “집에 가서 먹으면 되는디유” 하면서도 못이기는 척 들어와 밥을 먹고 갔다. 나는 이미 먹었는데 또 먹게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어쩌다 돼지고기 찌개라도 끓이는 날이면 서너 분을 데려와 같이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동네 어른들의 식성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칼국수를 하면 순만이 아버지를 부르고 생선찌개를 하는 날엔 미애 아버지를 부른다. 식구 중 아무도 그런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투덜대면 할머니께서는 “그냥 놔 둬.”라고 말씀하시는 게 다였고, 아버지께서는 “어서 오게. 같이 먹세” 하며 반기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매 끼니마다 많은 양의 식사를 준비하셨다. 부엌에는 언제나 찬밥이 남아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손이 너무 크다’고 못마땅해 했다. 어머니 덕분에 나도 지금까지 동네 분들의 식성을 거의 다 알고 있으며 먹던 모습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어머니도 그 분들도 모두 하늘나라로 가고 안계시다. 좋은 음식이 있으면 그 집에 갖다 주면 될 것을 왜 굳이 데려와서 같이 먹었는지 어머니께 여쭤보지 못했다. 끼니를 굶을까봐 염려하신 것일 게다. 그 분들이 대부분 성인 남자였고 아버지께서 육체노동을 안했던 형편으로 미루어 보아 홀로 농사일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의 처세술도 한몫 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한량인데다 대서소를 운영하셨기 때문에 집안일 뿐 아니라 농사일 까지 어머니가 도맡아 해야 했다. 일손이 모자랄 때에도 수월하게 동네 분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은 어머니의 평소 노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3대 독자일 뿐 아니라 아들이 없어 외로워하신다고 늘 걱정하신 것을 보면 아마 아버지를 위해서 동네사람들과 친밀감을 유지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힘든 일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문제가 있으면 팔걷고 나서서 직접 해결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여장부였다. 어머니의 그런 면을 나도 많이 닮았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걱정하기 전에 앞장서서 해결점을 찾아 나서는 점은 어머니의 유전자 덕분이다. 심지어는 음식을 많이 준비해서 남기는 것도 비슷하다. 가끔씩 형제들과 모여 앉으면 쾌산 아저씨의 파김치 먹던 모습을 얘기하는 것이 즐겁다. 밥도 반찬도 부족했던 시절 보리밥이라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흔쾌히 나눠먹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