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분수대(계간 에세이 문학 초회추천 작품)
2009.06.10 16:54:04 조회776
* 언젠가 폐교가 된 후암동 학교 자리를 찾았다가 썼던 글입니다. 그 당시 전체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수필의 형식을 갖추어 다듬은 것이 초회추천이 되었지요. 학교를 소재로 쓴 글이라 올려봅니다.
가끔 같은 꿈을 꿀 때가 있다. 그런 것들은 한 장의 음화(陰畵)처럼 경계가 모호한 흑백의 영상으로 엉뚱하게 왜곡되어 보이곤 한다. 하지만 깨고 나면 행복한 여운이 남는 것은 그 꿈들이 타임머신처럼 잠시 옛날로 나를 보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로 돌아가 헤매는 꿈을 왜 자주 꾸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중에는 내가 단발머리 여학생이 되어 학교에 가 있는 꿈도 많았다.
어느 날,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영화 여고괴담을 찍었다는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학교가 이사를 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없어졌거나 당연히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귀신영화를 찍을 만큼 폐허가 되어 그냥 남아 있다니. 정말로 귀신이 나온다 해도 가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친구와 길을 나섰다.
후암동으로 들어서던 그 거리를 가끔 지나치긴 했어도 정작 학교 교문에 발을 들여 놓기는 근 40여년 만이었다. 옛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리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옛날처럼 교정엔 햇살이 가득한데 단발머리 여학생들은 보이지 않고 자동차들만 가득했다. 아마 임시로 주차장을 삼은 것 같았다.
환한 햇살도 무색하게 건물들은 형편없이 퇴락한 채 괴괴하기만 했다.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건물 귀퉁이며 무너져 내린 계단과 다 찢어진 채 바람에 펄럭이는 차양들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불길하기까지 했다.
밝은 대낮인데도 시선을 알 수 없는 퀭한 눈동자처럼 시커먼 빈 창문에서 정체모를 무엇인가가 우리를 내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빈 교실에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선 보고 싶은 백합 분수대부터 가보기로 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이 우거진 검푸른 나무그늘 사이로 화살처럼 비치던 햇살과 항상 물기에 젖어있던 작은 디딤돌들, 기묘하게 비틀려 있던 등나무 등걸과 솟아오르며 끊임없이 돌돌거리던 물소리가 있어 시간만 나면 모여들던 우리들의 쉼터는 동문이라면 누구나 그리워하는 장소였다.
무슨 고민들이 그리도 많았을까, 걸핏하면 친구와 더불어 찾아가 마음을 털어놓던 곳, 그 또래의 비밀이 다 그렇듯 지금 생각해보면 하찮은 것이었지만 그때는 작은 가슴을 콩닥거리며 몰래 나누던 이야기들이 얼마나 달콤했던가. 뜻 모를 한숨과 덜 여문 모호한 꿈, 그리고 풀 길 없는 막연한 동경이 분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가라앉기를 되풀이하던 은밀한 장소였다.
소녀들의 재재거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분수도 잠시 제 소리를 낮추고 잦아들던 그곳에서 친구들과 찍었던 사진들은 전부 흑백 사진이다. 정작 분수대에 와 보니 등나무 가지에 기대기도 하고 벤치에 앉거나 서기도 하며 있는 대로 폼을 잡고 찍었던 그 사진들이 그대로 동영상이 되어 내 꿈속에 보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깊은 잠에 빠진 분수대도 혹시 그 시절의 소녀들을 꿈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다.
저만큼 떨어진 벤치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계신 줄도 모르고 선생님 별명을 부르며 흉을 보다가 그 신문지가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치는 바람에 혼쭐이 나던 곳도 그곳이었다. 그러나 기합을 받았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줍는 이 없어 저절로 시들어버린 은행 알들만 발에 차이는 메마른 분수대에서 그래도 우리는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버린 땅에 푸성귀라도 심을 양인지 땅을 갈아 울타리를 치고 있던 나이든 아줌마 한 분이, ‘왜 좋은 데 가서 찍지 이런 데서 찍으시우?’ 하며 의아해했다.
그 아줌마는 우리가 또 다른 여고괴담이라도 찍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폐허가 된 늦겨울의 분수대는 그만큼 스산했다. 우리는 말없이 웃었다. 그분이 알 턱이 없는 옛날의 아름답던 분수대를 우리는 만나고 있었지만 그분에게는 그저 버려진 땅일 뿐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공유한 적이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같은 곳에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볼 수밖에 없는 타인의 눈은 당연히 낯설다.
어쩐지 마음 둘 곳이 없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은행나무 위쪽 가지에 매달려 있는 스피커가 보였다. 쉬는 시간이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던 그 시절의 팝송과 포크송들이 귓속에서 맴돌았다. 조회나 전체 행사가 끝나면 쌍두독수리의 행진곡을 들으며 질서정연하게 교실로 돌아가는 소녀들... 그리고 재건체조 시이작! 하며 하낫 둘, 하낫 둘 음악에 맞춰 울리던 구령소리, 자주색 체육복 티와 하얀 바지의 무리들....
눈앞을 스쳐가는 부질없는 환영(幻影)을 날려버리듯 빈 운동장에 먼지바람이 일었다. 순간 녹슨 스피커에서 무슨 음악 소리가 들려온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것은 아득한 시간의 저편에서 보내오는 알 수 없는 신호 같기도 했다. 시간이 그냥 고여 있는 것 같은 폐교의 오후는 그렇게 비현실적이었다.
떠나오기 전 교문에서 다시 돌아다본 낡은 학교 건물은 더 깊은 침묵에 빠져든 듯 적막해 보였다. 언젠가는 그마저도 사라져버리겠지 싶어 설핏해진 마음으로 올려다 본 하늘은 푸르기만 했고 솜사탕 같은 흰 구름 한 점이 무심히 떠가고 있었다. 잡을 수 없고 이룰 수 없었던 여고 시절, 우리들의 꿈처럼. 다시 적요가 내려앉은 텅 빈 교정에는 기울어 가는 햇살만 긴 그림자를 뉘이고 있었다.
실제로 내 꿈속의 영상과 너무 비슷해져 있었지만 폐교의 모습은 꿈에서처럼 행복한 여운을 주지 않았다. 이제 학교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해도 전처럼 달콤한 마음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버려 둘 것을 그랬나 싶어 학교를 찾은 일이 잠시 후회스러웠다.
씁쓸하고 허전한 마음 탓이었을까, 돌아서 나오는 발걸음이 자꾸 허청거리고 있었다. 마치 꿈속에서 걷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