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곡사이트에 들어가면 박판길의 '유월나비'랑 정회갑의 '두고온 산하' 그리고 장일남의 '비목'과 변훈 작곡 '귀향의 날'이 계속 들려온다.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비감해지는 곡들이다.
그렇구나 유월이구나. 유월이라는 그 부드러운 어감에도 불구하고 유월은 우리들에게 먼저 그렇게 비장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하기는 이제 우리 세대가 다 세상을 뜨고 나면 그 유월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그때를 노래한 가곡들도 뭐가 이렇게 우울해 하며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세대들에게는 육이오에 대한 이야기보다 6.10 항쟁이 어떻고, 민주화가 어떻고 하는 담론이 더 실감나고 비중있게 다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육이오를 다섯 살 때인가 겪었다. 너무 어려서인지 앞 뒤가 끊어진 몇 몇 장면만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달구지 뒷 꽁무니에 앉아 다리를 길 위로 늘어뜨리고 소풍이나 가는 듯 신나서 흔들던 그 하얀 신작로는 뙤약볕 아래 유난히 희게 빛났었다.
삐그덕 삐그덕 들려오던 바퀴소리와 등뒤에 가득 쌓여있던 피난 보따리도 기억에 선명하다.
우리가 갔던 그 시골집은 마당이 넓었고 장독대 가장자리에 무섭도록 검붉은 자줏빛 맨드라미가 피어 있었다.
피난살이라 해봐야 그저 시골나들이 정도로 우리는 넉넉하게 살았다. 그 집이 누구네 집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버지 신세를 많이 졌던 분의 집이라 했다.
그러나 그 휴가같은 피난살이를 나는 길게 누리지 못하고 아버지와 둘이 전주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갑자기 목이 쉬고 컹컹거리는 수상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초등학교 일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박혜경이네 집은 전주에서 유명한 박소아과였고 그곳에서 법정전염병 '디프테리아'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모두 피난을 가고 텅빈 도심에 그 병원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니 정말 혜경이네 아버지는 훌륭한 의사이셨던 것 같다.
지금은 사라져서 그 병명조차 낯선 디프테리아는 호흡기 질환으로 매우 위험한 병이었다고 한다.
마침 치료약도 딱 한 사람 분만 남아 있었다.
폭격이 잦은 위험한 날들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때부터 빈 집에서 나를 돌보며 치료를 시작하셨다.
안방 책상에는 온집안의 이불이란 이불을 모두 쌓아 올려놓고 제일 큰 이불로 책상 아래까지 덮어씌운 다음
폭격이 있는 날은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시가지 쪽을 유심히 살피시던 아버지가 벼란간 '숨어라' 하고 외치면 나는 북북 기어서 책상 밑으로 숨어들어가 엎드려 있었다.
편대를 지어서 날아오는 폭격기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웅웅거리며 들려오면 으례 아버지는 대청 마루에 서서 향방을 살피곤 했는데 우리 집은 교외에 있어서 한 번도 그 폭격의 타겟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하다.
시가지에 퍼붓는 폭격 장면을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요란한 굉음과 시뻘건 불길, 그리고 구름처럼 피어나는 연기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덜덜 떨릴만큼 무서웠는데 사람이 그곳에 있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혼자 생각했던 것 같다.
병원에 가는 날은 누군가 와서 나를 데리고 갔다. 병원 가는 길에도 몇 번인가 소위 기총소사가 있었다.
나를 데리고 가던 그 아저씨는 날렵하게 나를 안고 언덕 아래 구덩이 같은 곳으로 숨곤 했다.
콩밭 이랑으로 몸을 숨겼을 때 코를 찌르던 풋내와 붉은 흙덩이, 그리고 콩잎에 스쳐 따끔거리던 느낌만 기억에 남을 뿐 무서웠다거나 하는 기억이 없는 건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아저씨가 내 생명의 은인인 것을 나는 다 자라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분도 무언가 아버지께 신세를 져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내 병원행을 도왔다고 나중에 들었지만 웬일인지 큰 감동을 받진 않았다.
나라는 사람이 은혜를 모르거나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내가 살아 존재하게 된 데에는 그렇게 세 사람의 손길이 숨어있었다. 물론 그 후의 삶 전반에 걸쳐서도 내가 모르는 사이 많은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그 깊은 상흔은 어린 눈에도 도처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느날 아버지 심부름 가는 언니를 따라 어딘가를 가고 있었는데 길가 무덤 옆이며 논두렁 할 것 없이
여기 저기에 아직도 연고를 찾지 못한 이름없는 주검들을 보고 혼비백산했던 기억과 무섬증은 지금도 생생하다.
피난 전이었나 후였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민군 부대가 우리집에 떼지어 몰려와 군장을 풀었던 기억은 정말 아슬아슬하다.
자기 키보다 더 큰 장총을 멘 소년병이 어린 눈에 무척 신기했다. 한 끼 정도 밥을 해먹은 다음 다행히 그들은 떠났다.
우리 집을 끝으로 동네 앞은 논과 밭 천지여서 도저히 비행기 정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게 이유였다.
안 그랬으면 그 후 벌어진 원한과 복수, 밀고와 린치의 몸서리치는 소용돌이에 우리도 휩쓸렸을 것이다.
낮과 밤이면 인공기와 태극기가 번갈아 걸리던 흉흉한 시절, 해묵은 감정이나 원한을 풀기 위해 한 동네 사람끼리 고발과 증언으로 죽고 죽이는 일이 날마다 벌어졌다.
높은 언덕받이에 있던 어느 집 마당에 사람들이 몰려가 그 집 주인을 때려죽이는 모습이 낮은 지대에 살던 내 어린 눈에까지 환히 보이던 끔찍한 시절이었다.
어른들의 수근거림으로 알게 되었던 그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던 혼란과 두려움이 지금도 이런저런 사람살이에서 문득문득 보일 때면 이상한 좌절감을 맛보곤 한다.
다시 또 유월이 왔다.
귀향의 날이나 비목이나 두고온 산하를 들으며 어린 날 겪었던 육이오를 떠올려 본다.
그러나 내 기억은 수많은 원통한 죽음과 이별을 겪은 그 시절의 영혼들 앞에 그저 한낱 감상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아 부끄러울 뿐이다.
요즘은 그 참혹한 전쟁이 끝나지 않은 채 다른 양상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잊어서는 안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