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사람 커피 업그레이드 시키다
2009.03.25 13:33:26 조회574
우리는 다방이라고 불리던 곳에서 처음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사회 초년생이 되어 찻집 출입을 할 때는 지금처럼 카페니 커피전문점이니 하는 말 대신 통털어 다방이라고 불렀다.
낮은 응접실용 소파에 역시 낮으막한 다탁을 마주 하고 앉으면 레지가 다가와 주문을 했다.
그 시간이 아침이라면 모닝 커피라는 것이 나왔다. 검은 커피물에 계란 노른자 한 알이 떠 있었다. 그 노른자를 풀어서 마시는 사람도 있었지만 맛이 섞이는 것을 싫어하던 나는 스푼에 떠서 먹고 커피는 따로 마셨다.
주로 원두커피에 설탕을 따로 넣고 귀가 쫑긋한 하얀 유백색 작은 용기에 연유인지 생크림인지를 넣어 가져와 살짝 부어주었다. 검은 커피물에 하얀 크림이 들어가 풀어져 섞이면 그제야 한약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동안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는 일이 유행하게 되었다. 모두 설탕도 크림도 넣지 않고 마셔야 커피 맛을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 세련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했다.
주문한 커피를 다탁에 내려놓고 나면 레지가 크림을 넣어주려고 커피잔 가까이 연유그릇을 갖다 댔다. 그러면 약속이나 한 듯 커피잔 테두리에 살짝 손을 대며 가로막는 동작도 모두 비슷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동작은 아주 보일 듯 말 듯 살짝, 그러나 단호하게 해야 했다. 절제된 그 거부의 표시에는 이상한 우월의식 같은 것이 엿보이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방의 커피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다방에 앉아 커피를 시키자 물을 붓지 않은 커피잔이 날라져 왔다. 커피잔에는 설탕과 가루 크림이 커피알갱이와 뒤섞여 있었는데 거기다 뜨거운 물을 붓자 갈색 액체가 먹음직스러운 우윳빛 크림과 어울어지면서 여지껏과는 전혀 다른 커피가 되어 있었다.
처음 그 커피를 대했을 때의 신선한 놀라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러워 강한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인스턴트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커피를 맛있게 탄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커피와 설탕 그리고 프림의 비율을 나름대로 조절하고 커피물의 온도를 따끈하게 할 뿐더러 커피잔을 미리 데워 놓으면 그 커피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커피도 정성이 들어가야 맛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인스턴트 커피는 오랜동안 그 대명사가 바뀌며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아줌마 커피, 파출부 커피, 최근에는 그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청와대 커피라고도 불리는 모양이었다.
커피의 온전한 맛과 향을 즐기기 위해서는 갓 볶은 원두를 내려 마시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여건들이 대부분이어서 보통 사람들은 그냥 인스턴트를 즐겨왔다.
어떻게 그 비율을 맞추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막대 커피 맛에 보통 사람들의 입맛이 길들여졌다. 절묘하게 대다수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주는 막대 커피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암만 해도 조미료를 넣은 것 같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상적(?)으로 배합이 된 커피는 뜨거운 물만 있으면 툭 털어넣어 마실 수 있어 편하고 좋았지만 프림이 나쁘고 설탕이 건강을 위협한다는 통계 때문에 막대 커피도 블랙이니 설탕만 넣은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요즘 우리 사무실에는 원두 커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커피 내리는 향기가 기분좋게 퍼지면 공연히 즐거워진다. 커피 찌꺼기를 버리고 새로 내린다든가 하는 일을 남정네들이 기꺼이 담당하고 있다. 새로운 재미라 그렇기도 하려니와 너무나 간단히 봉지를 털어 마시는 커피맛보다 수고와 정성이 깃든 커피가 아마 더 향기로운 모양이다.
덕분에 내 입맛도 좀 격상이 되어 아주 오래간만에 원두를 다시 즐기게 되었다.
역시 맑고 향기로운 원두커피는 마음까지도 그윽하게 해준다. 막대커피가 마치 달콤한 쿠키라도 먹는 것처럼 입에 착 붙는 맛이지만 텁텁한 것이 속까지 더부룩해진다면 원두커피는 쌉쌀한 향기로 우선 기분부터 상승시키며 속도 부담이 없다.
언제까지 갈지 모르지만 커피 취향이 달라졌으니 나의 고질적인 내장비만에도 좀 효과가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이래서 사람은 간사하다고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