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합창단 송년회를 마치고
2015.12.14 19:38:35 조회2007
올해도 어김없이 총동문회는 열리고
여전히 또 백합합창단이 2부 장기대회의 첫 막을 열었는데...
세 곡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우리는 3월부터 모여 열심히 연습했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잘 하고 싶었는데 나부터 실수를 했으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고백하고 싶은 이 마음이여...
왜냐구요?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그렇지요. 딴에는 정말 열심히 연습했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송년회 겸 뒷풀이로 그 동안의 수고와 아쉬움을 씻어내기 위해, 또 그 여운이 가시기 전에
우리는 다시 모였습니다.
연습 안하고 맛있게 먹고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날이 그리 흔한가요?
젊은이들이 자기들만의 문화를 향유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아니 아는 사람만 아는 은빛세대들의 마당이 있기 마련입니다.
서초동의 라이브 카페 '깐띠아모'가 그런 장소였습니다.
눈이 쌓이고 세찬 바람이 부는 궂은 날씨.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오자 아직 흩날리는 눈발에
가로수에 쌓였던 눈이 녹으며 선듯 선듯 비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어서 따스한 실내에 들고 싶었던 만큼 아늑한 실내가 우선 반가웠지요.
다리가 불편한 단장님을 비롯, 단원들 대부분이 참석하시고 지휘자도 뒤늦게 어린 딸을 데리고 오셔서 김정숙 총무님과 단장님의 인사로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무대 전면에는 알 수 없는 흑백영화가 저혼자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장면이 보이기도 합니다. 오드리 햅번은 낡은 필름 속에서도 여전히 청초하고 사랑스러웠어요.
우리 합창단 팀을 비롯해 모두 비슷한 세대의 여인들이 한 두어 팀 더 보이더군요.
출입구 쪽 안내창구 앞을 서성이는 남자가 보였지요..
모택동이 썼던 것 같은 모자를 눌러쓰고 같은 계통 색상의 정장 차림인데 모자 바깥으로 드러난 머리는 은발.
식사가 끝나갈 무렵, 그가 무대에 성큼 오르더니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silent night holy night'
시즌에 어울리는 노래에 분위기 좀 잡으며 들어볼까 하는 순간에 갑자기 뚝 멈추는 것입니다.
무대를 등지고 앉았던 나는 깜짝 놀라 돌아 앉았지요.
그는 화가 나 있었어요.
"나는 이렇게 시끄러우면 노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식사를 마친 사람, 아직 하고 있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이야기를 주고 받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하긴 청중의 태도가 거슬릴만 하기도 할만큼 소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좀더 유연하게 이끌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싶어 약간 아쉬웠으나 이어지는 그의 노래 실력은 자부심을 가질만 하더군요.
old pop의 여운이, 차츰 나이든 여심을 사로잡아갈 무렵,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신청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희망곡을 외쳤지요. 후배 한 분이 쪽지에 곡명을 써서 피아노 위에 놓고 옵니다.
동석했던 선배님이 'love me tender'를 신청해달라고 하시기에 나도 쪽지에 써서 무대로 올라갔네요.
피아노 위에 놓으려는 순간, 아뿔싸, 노래부르던 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며 화가 단단히 난 목소리로 일갈을 놓습니다.
"무대에 올라오지 말아요. 내가 노래할 때 무대에 올라오는 게 제일 싫습니다"
어찌나 놀랍고 무안하던지 한참을 그의 노래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자주 아니더라도 몇 번 가본 사람들은 그 집에서 지켜야 할 매너를 알고 그의 예술적 감수성을 건드리지 않았을텐데,
강북 촌사람이 그만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지요.
그래도 그렇지. 무대에 올라 자기를 소개하고 어떤 식으로 연주를 하며 어떤 점을 지켜주면 좋겠고
연주가 끝나면 다같이 노래부르는 시간이 있다는 정도의 인사는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어쨌든, 우리는 올드 팝이며 가곡, 동요, 그리고 가요에 이르기까지 모두 섭렵하며 한풀이 하듯 노래를 싫도록 불렀고. 즐거웠습니다.
"야, 노래들 잘 하십니다. 어느 합창단에서 오셨나?"
알고 있었을 텐데도 짐짓 그러더니 교가를 부르자고 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서초동 라이브 카페 '깐띠아모'에서 우리는 교가를 힘껏 부르며 더 큰 감회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낭만파들을 위한 사랑방이라는 곳, 깐띠아모.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그의 요구는 일종의 자존심이겠지요?
아웃 사이더의 자존심, 이해할 만 했습니다.
여자들이 모이면 시끄럽게 마련, 연주자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는데 아마 그분은 자신이 유명인이 아니어서 그랬나 했다니 말입니다.
어쨌든 백합합창단의 송년회는 그렇게 끝나고 또 내년을 기약합니다.
내년에는 안 틀리고 잘 해야지.... ㅎㅎ 이 결심 잘 해낼 수 있을까요?
합창단 선후배님들, 세모 알차게 보내시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하셔서 3월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