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선택한 삶 ♣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남침하여 일어난 6.25전쟁의 상처를 우리는 잊을 수 가 없다,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중요함을 교훈으로 남겼다.
그 때 우리 식구들은 일주일을 걸어서 충청도 시골 고향으로 피난을
갔었는데 끔직한 일을 목격했으며, 부역을 안하면 지내기가 무척어려웠다.
9.28수복이 되면서 훅석동에서 밤에 한강을 밀항을 해서 서둘러 서울집에
돌아왔지만 살기가 막막했다.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또 피난을 가게되었다.
중공군 남하(1950.11.02)인해전술로 아군은 1951년1월 4일 후퇴를
하게됐을 때 어머니와 나는 오빠가 살고있는 대구로 피난을 갔었다.
그러나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언니는 연년생인 어린 조카들이 셋이나
있고 또 임신중이였다. 밥 걱정은 없지만, 어머니는 근처에 사는
언니집에 가서 계셨고 수중에 돈도 없어 봉지,화투부치는 부업등도
해봤지만 그렇게 지내는 하루하루가 암담했다.
오빠에게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이 있으니 취직을
시켜달라고 했지만, 살림이나 돕다가 시집이나 가라고한다.
그러던중 간호후보생 모집 광고를 보게되었다.
망서릴것도 없이 원서를 받아와서 오빠에게 보였드니
여자가 무슨 군인을, 하며 찢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포기 할 수 없었다. 다시 원서를 받아와서
이번에는 형부 에게 공부도 더 하고 싶고,
나라에서 공짜로 공부를 시켜준다니 가고싶다고 했다.
형부는 쾌히 도와주기로 하고, 경찰서장님 신원보증서도 받아주고
또 한통은 어머니가 아시는 고향 분으로,
초대 서울 시장을 하셨던 이범승씨가 국회의원 으로
대구에 피난와서 계셨기에 부탁을 해서 원서를 냈다.
오는 길에 헌 책방에 들려 시험공부 할 책을
사가지고 와서 냉방에서 열심히 준비를 했다.
시험에 합격이되어 지금의 국군간호사관학교에 입교를 하게되었다.
학교는 부산 동래에서 범어사 쪽으로 가다가 어느초등학교인데
우리 뿐 만 아니라 군의관후보생, 의정장교후보생,그 외에도
교육받으러 온 군인들이 많았는데 임시 교사였으며 군의학교라고 했다.
군복을 입은 우리들은 서로를 보며 킥킥웃었지만, 더 웃기는 사람들은
군의관후보생들이 맞지않는 군복을 억지로 단추를 끼고 입은 모습이였다.
밤에는 불침번을 한 시간씩 서야했고 아침 새벽이면
군가를 부르며 행군을 해서 냇가에 가서 세수를 하고
돌아올 땐 춥기는 했지만 기분이 상쾌했다.
대형가마솣에 하는 밥을 큰 삽으로 양동이에 퍼주면
식사당번이 배식을 하는데, 반찬의 불평보다
삼층 밥으로 된 선 밥을 먹어야 했든게 큰 고역이였다.
얼마후 학교가 마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일본군이 사용했든 건물 이라는데
전망도 좋고 환경도 좋았다.
우리들 숙소는 벽돌건물로 다섯명이 침대를 사용하는 방이였다.
하지만 천막막사를 쓰는 곳이 많았다.
거기서는 전공분야의 공부를 했는데, 해부학, 생물학, 세균학,
병리학,간호학, 간호윤리학등, 그리고 음악, 영어,독어도 배웠으며,
하루종일 힘도 들었지만 배운다는 것이 좋았고,
규율이 엄한 생활이였지만 심신이 건강해졌다.
그당시 교관(교수)님 들은 서울대병원에 근무하셨든
교수분들이군복무를 위해 입대를 하셨기에
훌륭한 교수분들에게 배울 수 있어 큰 행운이였다.
내무사열을 받으려면 침구는 두부모 처럼 각을 세워야 했고,
치약, 비누, 신발등 소지품들은 께끗하게 정리 정돈이
완벽해야 외박 외출을 나갈 수 있었다.
외박을 보내주면 교통편이 무척 고생스러웠지만
대구 집에 잠시 다녀올 수 있었다.
외출을 보내주면 가까운 해변으로 나가서, 어머니~!!!를
소리쳐 부르며 그리운 집 생각을 잊으려
노래도 부르고 친구들과의 우정을 다졌다.
점심은 모아두었든 화랑담배로 중국집에 가서
요리를 시켜먹으며 중대장님,교관님들 이야기로
호호 하하 깔깔대며 자유를 만끽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충전하고 돌아왔다.
1년후 군병원으로 실습을 나갈 때 우리들은 편이상 소위로
임관을 하여 완숙하진 안했지만 겉으로는 어였한 간호장교 소위였다.
나는 대구에 있는 육군병원 으로 가게 되었는데
가끔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어린조카들이 어쩌다 오면
식반에 담아 먹는 군대 밥을 맛있다고 먹고 가기도 했다.
주변엔 산책 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성당도 있어 학교있을 때 보다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런시간도 잠시였다.
1953년 7월 27일(휴전 협정)그동안 치열한 천투로
많은 부상자들이 후송되어 와서 병상이 부족했고
들것에 그대로 빈틈없이 누워있는 전상자들의 신음소리는
가슴을 절이게 했으며 잠을 잘 수 없을만큼
바빴지만 우리들은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간호했다.
간호하면서 만난 장교 병실에서의 가슴아팠든 조 소위 이야기는
글로도 남겼지만, 전상자들의 부상정도와 사연들은
여기에 열거 할 수 없을 만큼 비참했다.
사지절단 환자는 몸통만 있으니 어찌 살아갈까! 의식은 멀쩡한데
그 고통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이같이 나라위해서 희생하신 6.25참전 상이군경용사님들,
이젠 나이들어 거이 다 돌아가셧 지만, 이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평화가 지켜졌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1년의 실습과정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 국가고시를 보고
합격이 되어 자격증을 취득하고 졸업을 하니, 힘들었든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며 건투를 빌었다.
이젠 학생이 아닌 당당한 대한민국의 간호장교소위가 되었다.
처음 발령을 받은 병원은 부산에 있는 제3육군병원이였다.
칭칭시하 시집살이를 좀 했지만 귀염도 많이 받았다.
처음에 밤번을 하게됐을 때 낮과 밤이 바뀌여
낮에는 자게되지않아 몸이 안 좋아지기도 했었다.
얼마후 미군병원에 합동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쉬운 일상적인 영어도 알아 듣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한번은 미군 간호장교가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하기에
따라갔드니, 자기 커피값만 지불을 해서 처음엔 당황했지만
우리 문화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고 익숙해졌다.
병원근무를 하면서 간호사로서의 전문 기술도 많이 쌓았지만,
나라사랑도 배웠고, 영내에 천막성당이 있어
성당에 나갈 수 있었으며, 근무하지 않을 때는
신부님의 강론집을 정리해 드리기도 하면서 신앙생활도 할 수 있었다.
그 후 전방근무 6개월은 해야하기 때문에, 제2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에 육군병원으로 발령을 받아 갔다.
그곳은 야전병원은 아니였지만 단기간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와 내과 환자 후방으로 후송될 환자들이 많았다.
그곳에 근무하면서 몇년전에 성당에서 알게된 개성에서
월남한 S동생이 서울에서 가정교사로 있는 집 아들이
진해 해군종합학교에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만나보라고 했다.
서울로 가서 만나보고 사귀면서 인연이 되어 6개월후
대전 육군 병원으로 가면서 거기에서 휴가를 받아
서울에 있는 종로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진해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지만 퇴역 명령이 날 때 까지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살림은 친정어머니가 도와주셨고
임신6개월 까지 진해와 대전을 오가며 근무를 했다.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환자들이 임신 인줄 몰랐다고하니 다행이였다.
가난한 군인 아내로 살면서 1녀 2남을 낳았고
남편이 퇴역하면서 68년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 때도 형편이 어려웠고 남편만 믿고 안주하기에는 마음이 편치않았다.
친구들과 연락이 되면서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데 선택의 기회가 또 왔다.
중등교사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시험을 보게되었고
합격이 되어 교련교사가 되었다. 자아실현의 끔도 펼 수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36세가 넘으면 공립학교에는 갈 수가 없어서 사립여고에 발령을 받았다.
양호교사와 교련교사를 겸임하면서 해병대출신장교였든
국어담당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지만,
나도 열심히 책임을 다 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알기에 교육에 기회만 있으면 열심히
연수에 참가하고 나를 갈고 닦았다.
그런중 교도교사 자격 연수가 있었는데 명문대 나온
선생님 이 우선이지만, 나를 보내주셔서 서울대에서
240시간 연수를 받고 80년도 교도 교사 자격을 취득하여
교도주임으로 학생들과 상담하면서 나도 배운것이 많았다.
인간 관계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그 사람 입장이 되어서
생각한다)가 중요함을 배운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련은
입시과목이 아니여서, 틈틈히 인성교육에 힘썼다.
90년 2월 모교로 발령을 받아 근무 하면서,후배교사들과
마음을 모아 잊고있었든 모교사랑을 실천했으며,
상담실에서 학생들과 만나면서 후배사랑도 할 수 있었고,
수업중에는 나의 선택의 경험담을 이야기 해주면서,
부모 탓 하지 말고, 안 좋은 환경 탓하지 말고,
미래를 성공으로 이꿀 수 있는 길을 현명하게 선택하라고,
진심으로 그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들려주기도 했다.
1996년 2월 16일 모교에서 정년을 마무리 할 수 있게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한다.
숨겨두고 싶은, 자랑 할 것도 못되는, 그 때 그시절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보니, 부끄럽기도 하다.
나라와 국민이 모두 힘들 때, 공부하고 싶은 일념으로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내가 국군간호사관학교에 지원을 해서
꿈도 꾸지읺았든 白醫의天使가 되어 나라 사랑도 실천하고,
교단에도 설 수 있었으니 그 때 너는 용감했노라 칭찬하고 싶다.
힘들다고 살아온 세월이 지나고 보니 행복하게 살았음을 감사한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천상 여자이셨지만, 외유내강(外柔內剛) 의
모전여전(母傳女傳)의 기질을 물려 주셨기 때문이 아니였나!
어머니께 감사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님을 나이가 들어서야 께달았다.
2007년 1월 28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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