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시간의 역산(逆算)
[중앙일보] 입력 2011.09.24 00:08
# ‘267-98’ ‘268-97’ ‘269-96’…. 다이어리 일일 칸에 조그맣게 적혀 있는 숫자다.
1월 1일부터 셈해서 267일째가 되는 오늘은 12월 31일부터 거꾸로 셈하면
98일이 남은 날짜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채 100일도 남지 않았다.
그동안 뭘 했나 싶은 자괴감이 아침저녁으로 갑작스레 쌀쌀해진
바람처럼 겨드랑이를 파고든다.
D-47. 그 앞에 ‘수능’이란 두 글자가 들어가면 그 의미는 명확하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하다. 수험생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마저
그 시간의 역산(逆算)에 볼모가 되어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D-68. 종편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회사 복도를 지나치다 마주하는
숫자판의 기호다. 30년 만에 부활하는 jTBC의 방송 재개일이 68일
남았다는 뜻이다. 시간의 역산에는 항상 긴장이 흐른다.
# D-32. 한 달 남짓 앞으로 다가온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그렇다 치고
내년 18대 대선이 D-452다. 어떤 식으로든 삶에 숨통이 트이길 기대하는
국민들은 그날을 손꼽아 역산하리라.
D-520. 이명박(MB) 대통령의 퇴임일이자 새 대통령의 취임일이다.
대한민국에서 대권은 5년 단임이다. 단 하루도 늘릴 수 없다.
MB는 1826일 중에서 이미 1305일을 지냈다. 정권을 잡는 순간부터
시간의 역산은 냉혹하리만큼 작동한다. 그런데 정작 대권을 잡은 이와
그 주변의 실세니 측근이니 하는 이들은 그 세월이 천년만년 갈 것같이 여긴 듯싶다.
하지만 이내 절감하기 시작한다. 끝이 다가온다는 것을!
# 물론 공공적인 시간의 역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사적인 영역에서도 시간의 역산이 얼마든지 있다.
결혼을 앞둔 사내는 자신의 스마트폰 배경화면에 한동안 ‘D-00’이라고 적고 다녔다.
배가 부른 채 기꺼이 회식 자리에 나타난 그녀는 즐기던 술마저 마다한 채
당연히 출산 예정일을 역산하고 있으리라.
군대 간 젊은이는 예외없이 제대날짜를 역산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은 출소일을 거꾸로 세고 있기 마련이다.
이런 시간의 역산은 차라리 또 다른 의미의 희망이다. 하루하루 줄어드는
그 시간의 역산이 없다면 어찌 오늘을 견디겠는가.
# 20대에 낳아 키우는 자식과 40대에 늦둥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같을 수 없다.
전자는 시간을 앞에서만 세던 시절에 낳은 자식이라 그냥 같이 자란다고 말해야 옳다.
하지만 후자는 이 녀석이 대학 갈 때 내 나이가 얼마인지, 시집 혹은 장가 갈 때
내 나이는 또 얼마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 만큼 긴장하고 성찰하며 키우게 된다.
40대 중반에 나를 보신 아버지는 훗날 암 선고를 받은 시한부 인생이었기에
환갑도 못 채우고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와 15년9개월밖에는 살지 못했다.
아버지는 막내인 나를 보고 분명 시간의 역산을 하셨으리라. 그것은
아낌없이 주고 가는 사랑의 카운트다운이었다. 물론 인생 자체는 유한한 것이지만
정작 시한부 인생이 자신에게 닥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어떤 삶의 고비에선가 ‘시한부’라는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당혹하고 절망한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를
추슬러 마지막 남은 인생을 정리하겠다는 심정으로 기꺼이 시간의
역산을 시작한다. 물론 그 시간의 역산은 참으로 가혹하리만큼 인생의
영수증을 내놓으라고 독촉하기 일쑤이겠지만. # 인생의 시간을
앞에서부터 세다가 뒤에서부터 세기 시작하면 그땐 철이 든 거다.
그런데 어른들 말씀에 “철들면 죽는다”고 했다. 그렇다. 철들면
머잖아 삶을 마감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생이 시간을 역산하기 시작하면
비록 그 시간이 얼마이든 간에 삶은 의미를 발견하리라.
시간의 역산은 괜한 초조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충수가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소박하지만 진지한 애정의 표시다.
그러니 삶의 순간순간, 그 마디마디에서 시간을 역산해보라.
그때 비로소 삶의 소중함과 간절함을 깨닫게 될 테니깐!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