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서 만난 새벽 달님 / 이명숙8
2009.01.09 16:31:37 조회705
산책길에서 만난 새벽 달님
어제 밤 밝고 산뜻했던 노란 모습을 밤새에 바꾸어
어인 일로 이렇듯 하얀 얼굴에 근심 어린 표정이십니까?
까만 줄 수평선을 배경으로 어두컴컴한 바다 위에 어쩌자고
은빛 그림자를 드리운 채 이른 새벽 시간까지 머물고 계십니까?
차마 길을 떠나지 못 하시는 사연이라도 있는 겁니까?
혹시…
굶주림을 끌어 안고 머리 위 하늘을 지붕 삼아
길에서 웅크리고 잠자는 무숙자를 보신 건가요?
높은 열에 들 떠 손발을 허우적 거리며 보채는
병든 아기의 고통스런 울음소리를 들으셨습니까?
고된 노동 후 술취한 아빠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다 지쳐
숙제장에 코를 박고 잠든 소녀의 외로움에 눈물 지으셨나요?
올망졸망 누워있는 아이들의 가난한 얼굴을 살피며
아침 끼니 걱정으로 한숨 짓는 주부가 애처로우셨습니까?
찾는 이 없는 병상에서 오늘을 넘기지 못할 목숨이 두려워
떨고 있는 할아버지의 슬픈 숨결을 느끼셨나요?
세월을 탓하며 캄캄한 감방에서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무력한 죄수들의 절규가 가슴을 찢는 듯 했습니까?
바다 건너 저쪽 땅 전쟁터에서 벌어지 대량 살상
무고한 피난민들에게 가해지는 폭탄과 유괴와 고문
.....
당신이 밤새 보고 듣고 느끼신 가엾고 추한 어이 없는 일들이
지금 막 동녘에서 떠오르는 햇님이 환한 얼굴로 방긋 웃으시면
조금은 덜 슬프게 여겨져 하루가 그런대로 견딜만 합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빈곤, 질병, 고통, 전쟁, 죽음의 저편을 살피면
희망, 용기, 인내, 화해, 평안이 애초부터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강아지를 앞 세워 새벽녘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당신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이제는 너무 상심 마시고 새 날을 맞는 세상을 너그럽게 축복해 주십시오.
황명숙
2009년 1월
(십년간 몬트레이에서 즐겼던 산책을 회상하면서 표현해 본 새해의 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