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童心)에 심어주는 낙엽의 기원(祈願) /이명숙8
작년 늦가을부터 산책길에서 낙엽 몇개씩 주워오는 버릇이 생겼다. 견본을 모아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낙엽의 색깔과 모양을 골고루 챙긴다. 두툼한 책갈피에 끼워서 눌러 말린 낙엽의 수가 이제는 꽤 늘었다. 거실 한 구석을 곱게 장식하는 한 뭉치의 낙엽을 보면서 나는가끔씩 중얼거려 생색을 낸다. ‘내 덕에 너희들이 이렇듯 아름답게 보존되고 사랑받는다.’고.
낙엽을 보며 남달리 연민의 정을 느끼는 이유는 낙엽의 일생이 인생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인간에게 휴식을 제공했던 나뭇잎이 그 본분을 다하고 이제는 철따라 본체인 나무에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려 한다. 우주의 본체를 떠날 계절이 내게도 가깝게 닥아오고 있음을 내 나이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소멸이라는 자연의 순리에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심사로 내가낙엽 보존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이름을 남긴다는데, 내 존재는 어떤 흔적을 남길까? 이제 막 세 살이 된 손녀를 주말마다 만나면서 그 아이가 철이 들어 삶의 의미를 깨닫는 때에, 어릴 쩍에 같이 놀아준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으려나 궁금해 한다. 즐거워 함께 웃고 어우르는 사랑의 체험이 아이의 동심에 귀한 추억으로 전수(傳受)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동안 나는 손녀를 위해 많은 장난감 동물을 만들었다. 코끼리, 거북이, 기린, 도야지, 다람쥐, 양, 닭, 물고기 등등.. 아이가 조르는대로 지금까지 만든 것만도 열 댓가지가 된다. 장난감이 자기 방에 넘치게 많으면서도 아이는 솜으로 몸을 채운 털실이나 헝겊의 할머니 작품이 좋은가 보다. 끈으로 이은 여러 개의 빈 휴지 상자가 써커스 기차의 역활을 하니 아이는 칸칸마다 동물들을 태우고 내리며 재미있어 한다. 신나게 기차를 끌고다니는 아이의 모습을 사진을 찍듯이 가슴에 새겨 기억의 한 장면으로 간직한다.
손녀가 곧 인형에 관심 가질 것을 대비해서 12인치 키의 인형을 사고, 갈아 입힐 옷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라우스와 스커트, 불루진, 조끼, 스웨터, 재켓, 오버코트 등등… 내가 보기에도 앙증맞고 예쁘다. 내가 기억하는 내 엄마의 첫 이메지가 내 유치원 시절 흰 동정까지 달아 만들어 주셨던 인형의 한복이기 때문에 나는 기여코 흉내를 내어 한복까지도 만들었다.
침침한 눈을 비벼 바늘귀를 끼면서 나는 손녀에게 훗날 할머니를 회상시킬 매체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음미하곤 한다. 낙엽처럼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내 존재가 낙엽의 색채와 모양을 닮아 손녀의 마음 구석에 남고, 거기에 소중한 이야기들이 곁들여져 기억된다며는 그 이상 바랄 것이 또 있겠는가? 랜디 포시(Randy Pausch) 의 유명한 <마지막 강의(The Last Lecture)>도 췌장암으로 시한부 생명을 살면서 그가 가족들에게 자신을 기억할 수 있게 하려고 남긴 것이라지 않는가? Youtube에 올려진 그의 강의 동영상을 보면서, 나는 유전인자나 사후의 저 세상만이 영원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번 더 굳혔었다.
점들을 이어 선을 그리듯이, 순간들이 이어져 영원을 만드는 그 이치에 골몰했던 때가 있었다. 영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내 나름대로 구체화하여 인간 의식 (意識)의 전달이라는 정의를 내려 보았었다. 그랬더니 영원은 이 세상 밖 아무도 모르는 딴 세계에 숨어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나와 함께 현존하는 체험으로 이해되었었다. 한 순간을 살고 가는 한 인생이 바로 그 영원의 한 부분. 내 속에 영원이 존재하고 영원 속에 내가 사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기에 영원의 다음 순간, 다음 부분을 살아갈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 자신의 의식을 손실없이 기억하게 하려는 노력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기억을 어떤 방법으로 전수시키려는지, 일생을 거쳐 노력하는 그 여하에 따라 인격의 품질이 좌우된다고 보면, 인생여정이 곧 노력 자체라는 교훈은 오히려 부담이라기 보다 감사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내가 젊은 엄마로서 무조건 아이를 사랑하던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차원의 영원성을 이렇게 할머니가 되고나서 비로소 깨닫는다.
어느날 산책길에 따라 나선 손녀는 달팽이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눈을 굴리다가 머리를 껍질 속으로 감추는 달팽이를 한참 들여다 보고, 또 날아다니는 꿀벌을 따라 총총 뛰기도 하더니, 가쁜 숨을 고르고 정원의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면서는 내게 손짓해 큰 소리로 감탄한다. ‘할머니ㅡ, 여기 꽃들이 알룩 달룩해요!’
황명숙
2008.10
이명숙 친구의 수필을 소개합니다.
나에게 e-mail로 소식과 함께 보낸 수필을 친구들과 함께 보려고 올립니다.
뉴욕에서 최월희의 격려와 소감!
Dear Myungsook,
Congratulations. This is a beautifully written essay. The most abstract and profound are expressed in the most concrete and common. I'm particularly struck by your idea of eternity in the present moment in your definition of "rendering individual consciousness" into the currents of humanity, which has little to do with genes. I was also happy to see all your hand-made toys as if I were in your apartment and taking with you. I hope you'll make some effort trying to publish it, which will be a befitting activity which is within your definition of eternity. Love, Wol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