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리지 말라우 ! ”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중앙일보 2011.07.23)
그는 안경 너머 주름 깊게 파인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동안 말문을 닫았다.
아마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말로 다 못 할 기억과 회한에
몸부림치느라 그 순간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
본능적 방어의 몸짓이었으리라.
잠시 후 그는 눈물 글썽인 눈을
어렵사리 뜬 채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나를 울리지 말라우!”
그의 말투에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진한 서북(평안도) 사투리의 흔적이 역력한 것처럼
그의 속에는 아무리 동여매고 싸매도 가슴 시린
아픔과 회한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다만 드러내지 않고 내색하지 않았을 뿐!
지난 목요일 오후 서울역 구내의 한 작은 찻집에서 마주한
서양사학계의 원로 노명식 교수는 여든여덟 살이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여전히 놀라운 기억력과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30년 전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와 학생이었던 우리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최대한 의자를 당겨
무릎을 맞대다시피 하고 마주 앉았다.
학부 시절, 나는 서양사를 전공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를 빼놓지 않고 들었다. 그는 강의에 들어오면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카드 몇 장을 꺼내 들고 말없이
칠판 가득 단어와 문장들을 적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하곤 했다.
그것들이 그날 강의의 키워드들이었고 그는 그것들을
종횡으로 엮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당시 그의 강의를 들으며 “그래, 나도 언젠가 교수가 되면
저렇게 강의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에게서 배운다.
얼마 전 그가 평생에 걸쳐 쓴 저작들을 묶어
12권의 전집으로 자비 출간한 것을 옆에 끼다시피 하고
거의 매일 숙독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를 통해 다시금 깨치고 배우는 것은 서양사의 지식이기보다
평생을 전쟁의 연속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내면에 그려진 처절한 역사적 풍경
그 자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구십 년 가까운 인생은
가위 전쟁과 함께한 나날이었다.
그가 요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1학년에
들어간 것이 만주사변이 시작된 1931년이었고
중일전쟁이 개시된 37년엔
요즘 중고등학교인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한 때는
태평양전쟁이 막 터져 확전되던 때였다.
폐병을 앓은 덕분에 학병으로 끌려가는 것은 면했지만
43년 말 학업은 중단됐다.
해방 후 어렵사리 다시 학업을 이어 경성고상에 편입해
졸업한 후 경성대학(국대안 파동 후 서울대학이 됨)에
진학해 졸업했지만 6·25전쟁의 발발로
그토록 꿈꿨던 미국 유학은 포기해야 했다.
자신의 세대는 전쟁의 신 ‘마르스(Mars)’가 지겹도록
따라다닌 지독한 운명의 세대라고 그는 말했다.
그 세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 지독했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휴전’인 채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6·25전쟁은 그에게서 기둥처럼 믿고 따랐던 형을 앗아갔다.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수원농대(서울농대의 전신)에 막 입학했던 일곱 살 아래 동생은
전쟁이 발발한 그해 늦가을 일등병 계급장만 남긴 채 전사했다.
53년 7월 27일 휴전은 됐지만 북에 남아 소식을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막내여동생과는 영영 생이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6·25전쟁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던 일본의 광포한 질주와
그것의 처절한 패망에 따른 분단이란 예기치 못했던 모순에서 잉태됐다.
더구나 ‘휴전’이란 이름 아래 결코 매듭지어지지 못한
역사의 질곡은 여전히 우리를 옥죄고 있다.
그것을 온몸으로 겪었던 이들이 점점 줄어간다고
그 아픔 자체가 사라질 줄 안다면 착각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 끝나지 않은 전쟁의 연속선 위에 엄연히 서 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의식하는 것! 그것이 역사의식이요,
진짜 역사공부가 아닐까 싶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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