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무의도(小舞衣島) 기행
김용직(구고, 1959년 8월, 「백합뉴스」에 전재)
1.
아침 여덟 시, 그냥 보트라기에는 너무 크고, 그렇다고 버젓이 기선(汽船)이라고 불러주기에는 아쉬운 데가 있는 종선을 탔다. 몇 톤이나 될까? 군데군데 페인트가 얼룩져 있는 갑판 위를 거닐면서 배 무게를 가늠질하고 있을 때 부웅부웅 뱃고동이 울렸다. 그게 우리의 출범이었다.
배가 내항을 벗어나자 바다에는 바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흐린 하늘 아래 감청색 물은 뒤설레고 있었다. 기우뚱기우뚱 흔들리는 선체.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호흡을 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활력이 되살아나기라도 하듯 사지에 힘이 뻗어났다. 새삼 운동회 날 만국기 앞에 선 10대의 소년 때처럼 가슴이 뛰기도 했다. 맨스필드의 한 줄을 입 밖에 내면서까지 읊조렸다.
휘날리는 흰 구름 바람 이는 날
튀어나는 물보라와 갈매기 울음
그들만 있으면 그만이라네.
2.
통통 가벼운 발동 소리를 들려주며 한 시간 남짓 달린 배가 섬에 닿았다. 그래도 마중이나 배 구경을 나온 사람들은 하루 몇 번씩 버스가 닿는 시골 정류장 정도도 못 되었다. 바다에 살면 낯선 얼굴마저도 흘러가는 구름처럼 무관하게 생각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안내하는 뱃사공의 뒤를 따랐다. 긴 돛대를 하늘 향해 치켜세우고 있는 어선들 사이를 빠져나와서 엎드린 듯 낮은 초가집들 앞을 지났다. 몇 분의 서생님들과 학생들이 여장을 푼 곳은 꽤 깨끗해 보이는 함석지붕의 집, 가벼운 뱃멀미를 일으킨 학생들이 금세 생기를 되찾았다. 블라우스에 짧은 바지에, 따로 마련해 온 옷들을 바꾸어 입기가 바쁘게 맑고 높은 웃음들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육지의 거추장스러운 유산 가운데 하나인 우울증까지도 낡은 옷들과 함께 여장 뭉치에 접어 넣은 것인지 몰랐다.
열 한 시 경 아침 겸 점심이 끝나자 곧 원색 의상 쇼라도 벌일 듯한 차림들로 바닷가에 나섰다. 지글대는 8월 태양 아래 바다는 맥주처럼 싱싱한 거품을 일으키며 넘치고 있었다. 성급히 뛰어드는 패에 그저 맥고모만 만지작거리는 패가 처음에는 대조를 이루고 있었으나 곧 뒤설레는 바다의 품속에 몸을 잠글 수 있었다.
첫 날이라서 수영은 두어 시간 남짓으로 뭍에 올랐다. 살펴본 눈치로는 제대로 헤엄 흉내라도 내는 학생은 얼마가 되는 것 같지 않았다.
3.
섬과 바다는 해가 지자 더욱 제 맛을 내기 시작했다. 트랜지스터를 타고 내륙은 33,4도의 폭서(暴暑)를 전했는데도 바닷가에는 나서기만 하면 무한량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더욱이 마을 앞에 길게 뻗은 방파제는 참 좋았다. 우리는 저녁이 끝나기가 바쁘게 몇 장의 담요를 들고는 그리로 몰려가곤 했다. 그 시멘트 바닥에는 아직도 하루를 내린 태양의 열기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 위를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참으로 싱그러웠다. 더러는 눕고 더러는 앉아 가만히 발아래 찰싹이는 파도 소리를 듣노라면 공연히 먼 나라 또는 다른 대륙의 물기슭이 그리워졌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 명멸하는 인천항 등불도 보였다. 우리는 그 불빛을 바라보며 그 아래 피어날 인정을 믿었다. 그리고 새삼 인총(人叢)의 거리가 그리워질 때 소리 높여 대안을 향해 목소리를 모았다.
‘대무의도여 대답하라!’ 이어 알로의 합창.
그러면 더러는 어두운 건너편에서도 등불이 움직였고 무어라는 목소리를 담은 말들이 물이랑을 넘어 돌아왔다.
때로 참새들처럼 재갈거린 입들이 닫힐 적도 있었다. 평소 오만가지 것이 화제가 되는 나이들이 그런 때는 어두운 바다 가득 심어진 별빛을 보며 그 옛날 심청(沈淸)의 이야기라도 생각했음이었을까. 그리고는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그렇게 슬픈 내일을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될 조국의 자유(自由)와 평화, 통일을.
바로 등불이 깜박이는 곳 거기, 그 날 그 언니, 오빠, 동무, 동생들이 흘린 더운 피로 일어난 제2 공화국의 미래가 있었다.
4.
잠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취했다. 그대로 마룻바닥에 때 묻은 담요조각들만의 명색 침구였으나 눈이 붙기가 무섭게 곯아 떨어졌다. 작은 섬에 학교가 있다는 게 사뭇 신기하기만 했던 우리에게 그 교실은 얼마나 고마운 잠자리일 수 있었던 것인지. 교명 무도(舞島)초등학교. 양철 지붕의 조그만 목조 건물에 교실이 셋. 교장 선생님과 세 분이라는 선생님이 같이 쓰고 있는 직원실까지 합쳐야 네 칸밖에 되지 못하는 학교에 학생 수 80명, 그래도 1학년에서 6학년까지 과정을 이수하는 학생이 고루 있어서 수업이 복식이라고 하였다.
철썩철썩 베개 밑에서 들리는 듯한 물결 소리에 선잠을 깨고 보면 새벽이곤 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운동장에 나서면 남향으로 된 교사, 그러니까 동측이 그대로 바다. 임해교실(臨海敎室)이란 걸 말만 들었지만 운동장가에 쌓아 올린 축대 밑이 그대로 해안선이었다.
때로 태풍이 불어오면 노한 바다는 그대로 학교 운동장에까지 넘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가 처음 수영이라고 벌인 장소도 바로 이 학교 앞이었다. 이름이 서해라서 그 물이 아주 맑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빨강이, 파랑이 수영복을 걸치고 나서면 바다는 아주 짙게 푸른빛이었다.
다만 하나 두통거리가 되었던 것이 해안 일대에 깔린 굴 껍질이었다. 해수욕장으로는 옥의 티가 아닐 수 없게 백사(白沙)라고는 촌토도 없는 돌마당이었는데다가 그 돌과 돌이 제대로 있는 게 없다시피 다닥다닥 패각류들을 달고 있었다. 또 그 조개들이라는 게 제법 따먹으며 바다의 낭만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고급인 것도 아니었다. 마치 무슨 종기 자국처럼 멋없이 바위들에 붙어 자라는 류. 상없이 날카롭기는 해서 엷은 학생들의 발바닥이 닿기가 무섭게 찢어지고 했다. 첫 날부터 부상자 속출. 그 가운데는 무르팍 살이 이삼 센티 가량 달아난 학생도 있었다.
서해안 간만의 차는 말만 들었던 것이 정말 눈앞에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저녁 두 번씩 밀물이 되고 그 사이가 썰물인데 만조 때는 없던 바위가 조금 있다 보면 제법 작은 산만한 것이 되고 했다.
이 간만의 차에 골탕을 먹고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게 또 하나의 수영장이다. 마침 섬 남쪽에 그럴듯한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다가 반월형으로 굽어들어 있는데다가 물이 또 고요했다. 더욱이나 산기슭에 옹달샘까지 있어서 한바탕 물속에서 농탕을 친 다음 소금물을 씻어 내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그 물이 조금도 짜지 않고 순하대서 우리가 지어 부른 이름이 순아샘. 섬사람들 손으로는 그런 우물에라도 이름 하나 붙여 놓은 걸 못 봤다. 우물뿐이 아니었다. 언덕이고 산이고 제대로 풍류의 자취는 찾을 길 없었다. 나중에 우리는 좀 익살스러운 생각을 하며 섬에 있는 두 개 산 중 하나인 당산을 꽃보래산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5.
어느 모로 보아 섬은 소개인 채 남아 있다는 게 옳았다. 조그만 고개를 가운데 두고 동쪽과 서쪽에 모여 사는 집들이 합쳐 80여 가구,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가난한 산골이었던 내 고향을 생각해본다면 한촌이라고 할 수는 없는 마을이었다. 마을 앞을 지날 때 들리는 라디오 소리들로도 그런 사정은 넉넉히 짐작되고 남았다. 때마침 민어 철이기도 했지만 하루 저녁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 잘하면 이만 환 남짓, 그 위에 동쪽 해협에서는 이 섬 특산품인 새우도 수확되고 있었다. 봄 한철과 늦가을에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그물을 쳐서 잡는다는 이 지방 새우는 그 이름이 동백화라고. 특히 질과 양이 아울러 풍성하여 옛날에는 중국과 일본에까지 판로가 있었다 한다. 지금은 시세가 없다고 한탄하는 소리도 들었지만 그래도 섬사람들 주머니를 6월 염천 아래 갈라지는 논바닥만 바라보아야 하는 산촌 사람들의 그것에 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뿐이었다. 의식주가 해결된 다음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것, 말하자면 문화라든가 풍류세를 느끼게 하는 역사의 맥박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현장답사랍시고 노트를 들고 나선 우리가 기껏 주워 모은 것이 옛말 두어 개, 변말 몇 개. 그 흔한 민요 하나, 무슨 전설 하나 제대로 찾을 길이 없었다면 믿지 않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6.
이 섬에 처음 인간의 발이 닿은 것은 사백 칠십여 년 전 박동지라는 분이 그 첫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헤엄에 능했다. 그런 솜씨로 능히 본토와 섬 남쪽에 있는 해녀섬까지 몇 마장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그 남쪽에 주목망을 놓아 새우를 잡았고 흑 귀로에 큰 고기라도 덤빌라치면 준비했던 고기들을 던져 주어 위험도 면했다는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본명이 무엇인지 그 밖의 일은 일체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묘가 섬 북쪽 바다가 내려다 뵈는 언덕 위에 있었다. 초라한 모습이 별로 돌보아 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적으나 그래도 한 섬의 개척자는 그렇게 숱한 세월 속으로 풍화되어 가는 것이었다.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섬사람들이 주변 암초들에 붙인 이름이 곧 ‘여’라는 점이었다. 동남쪽 끝에 두 개 암초가 각각 목여와 넓적여, 그리고 우리가 상륙했던 서쪽에 있는 게 골여, 또 정남향에 조그만 무인도가 해여, 그리고 북동향에 대동여,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살뜰히 ‘여’라는 어미만 갖다 붙였든가 제대로 알아낼 길은 없었으나 다만 대동여만은 좀 색다른 호칭 연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옛날에도 암초였다는 말이었다. 한번은 섬들에서 공세물을 싣고 지나던 배가 여기에 부딪쳐 버렸다. 배가 파선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실었던 세물이 그대로 수장되었기 때문에 그 후 섬사람들이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암초 앞에 자리한 언덕을 부처님이라고 했는데 어느 무자한 사람이 만년에 거기 부처를 모셔 섬기고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종의 전도 설화가 아니겠는가 짐작해 보았다.
그 밖에 이를테면 섬 이름을 중심으로 품었던 천녀(天女)의 날개옷 등(섬 이름이 소무의도였으니까)에서 연상된 이미지의 파편에 들어맞을 만한 이야기는 약에 쓸 정도로도 비치는 게 없었다. 하긴 하나의 의젓한 전설 같은 것이라도 간직하고 있기에는 섬의 역사가 너무 얕은 것인지도 몰랐다.
7.
파도에 잠이 깨고 그 소리에 잠드는 섬의 나날, 짧은 엿새 동안에 그들 생활을 적게라도 체험했다고 말해볼 용기를 나는 갖고 있지 못하다. 무엇보다 그들의 평생은 파도 위에 있는 것이었다. 가령 혼사를 생각해 보자. 진달래, 개나리 핀 길, 나비, 아지랑이를 넘는 꽃가마 대신 파도를 넘어오고 파도를 넘어서가는 아가씨와 새댁들을, 그리고 그 숱한 임종의 자리에도 넘나드는 파도와 배. 워낙 좁은 섬은 그 주민을 묻을 수가 없다는 불문율을 세우고 있던 것이다. 상사(喪事)가 나면 배를 다루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물과 고물을 든든히 밧줄로 연결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위에 평생 파도와 싸운 지아비며 안내의 관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먼 훗날 우리가 다시 찾아든대야 섬은 낯익은 이름의 묘표 하나 세우고 있지 않을, 그렇게 그렇게 비정한 땅이었다. 마지막 짐을 맨 채 돌아올 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방파선 위에서 몇 번이고 생각했다. 마치 조금 때 수평선이 되어 오르는 햇살 같은 것 또는, 고을이면 고을, 마을과 포구마다 펄럭여야 할 깃발 같은 보람 같은 것. 무의도 그 가운데도 소무의도(小舞衣島)는 풍랑 따라 멀리 흘러가지도 못한 슬픈 국토와 한 조각 이름대로 섬이었다.
(구고, 1959년 8월, 「백합뉴스」에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