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1. 백합문인회 창립기념 세미나 원고
한국현대시 대표작 읽기-
정지용, 서정주, 한용운을 중심으로
김 용 직
시의 언어 ― 말의 정서적 사용, 탈진술의 세계
의사진술의 차원, 함축적 기능의 언어, 비유
시는 언어를 표현매체로 하는 문학의 한 양식이다, 현대시론, 특히 뉴·크리티시즘에서는 시의 표현매체인 언어를 일상의 언어와 구별한다. 전자를 진술(statement) 형태의 언어라고 하는데 반해 후자를 의사진술(pseudo statement) 언어라고 한다. I. A. 리챠즈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들은 대개 그 무엇을(관련대상-referent) 지시하기 위해 쓰인다. <무궁화는 나라꽃이다>, <독도는 동해 한 가운데 있는 섬이다> 등은 대체로 지시내용을 가진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그와 달리 무엇을 지시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정서를 함양시키는 각도에서 사용된다. 전자를 과학적 언어(Scientific Language)라고 하는데 반해 시의 말을 정서적 용법에 의한 언어(Emotive Use of Language)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치환의 「울릉도」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 보자.
동쪽 먼 섬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구비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國土)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사전적인 의미로 치면 울릉도는 동해바다 위에 떠있는 한 개의 섬이다. 그런 섬이 이 시에서는 위치나 크기, 자연지리나 인문지리 상의 여러 사실을 지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노래되었다. 여기서 울릉도는 우리 국토에서 떨어져 나간 막내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이것은 이 시의 언어가 실용문의 차원이라고 고쳐말 할 수 있는 일상용어에 의거하지 않은 것임을 뜻한다. 이 시의 작자는 애초부터 울릉도를 그런 개념지시의 차원과 무관하게 읽는 이에게 어떤 정감을 자아내도록 노래한 셈이다.
이처럼 시에서 시인은 개념지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의 함량이 극대화되도록 말들을 쓴다. 또한 그 방편으로 시인들은 매우 빈번하게 표현기법으로 비유를 쓴다. 두루 알려진 것처럼 비유는 주지(tenor)와 매체(vehicle)로 이루어진다. 현대시에서는 이때 비유의 두 요소인 주지와 매체가 의미의 상관성에서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말을 바꾸면 주지와 매체는 그 의미내용으로 유사성이 있기보다는 이질적인 각도에서 쓰여야 하는 것이다. 가령 봄을 제재로 한 작품에서 종달새나 아지랑이를 매체로 쓰면 그 비유는 기능적이 못된다. 이 경우 우리는 김춘수의 <복사꽃 그늘에 서면 / 내귀는 새보얀 등불을 켠다>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시의 몇 가지 유형, 물리시와 관념시
일찍부터 우리 선인들은 좋은 시가 언어를 통한 그림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시중유화(詩中有畵)>. 이것은 시가 펼치는 정경이 손에 잡힐 듯 생각되고 그림을 볼 때처럼 인상적인 형상과 색채를 가져야 함을 뜻한다. 또한 이 말은 시의 언어가 개념적일 것이 아니라 감각적이며 선명한 정경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보랏빛 구름으로 선을 들른
회색의 캔버스를 등지고
꾸겨진 빨래처럼
바다는
산맥(山脈)의 첨단(尖端)에 걸려 퍼덕인다
― 김기림, 「기상도」, 일부
이것은 1930년대의 우리 시단에 등장하여 모더니즘의 기치를 펄럭이게 한 김기림의 시다. 여기서 김기림(金起林)의 시적 소재가 된 것은 바다다. 사전적 의미의 바다란 육지의 상대개념으로 물이 넘실대는 공간이다. 일상생활의 차원이라면 그것은 해가 뜨고 달이 지며 갈매기가 날고 크고 작은 배들이 항해하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바다를 김기림은 <꾸겨진 빨래처럼>이라고 하여 매우 특이한 풍경의 공간이 되게 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시의 중요요소인 비유가 이질적인 요소들의 폭력적 결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현대시의 기능적인 이해를 위해 뉴·크리티시즘의 시각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일찍 신비평의 선두주자였던 J. C. 랜섬은 시를 크게 보아 소재나 제재를 정신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노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등 두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했다. 전자에서 시의 소재인 산이나 바다는 그냥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유형의 시에는 자연과 우리 주변의 여러 사물들에 사상, 관념을 부가시킨 것이 있다. 장미를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하면 전자에 속하는 시가 된다. 그에 대해 장미=목숨보다 소중한 <사랑>이라는 내용을 노래한 시가 있다. 그렇다면 그 시는 명백히 전자와는 다른 유형의 시로 거기에는 시인의 의식이나 관념이 추가되어 있는 것이다. 전자를 랜섬은 물리시(physical poetry)라고 했으며 후자를 관념시(platonic poetry)라고 일컬었다. 이때 물리시란 작품의 제재에 근본적 변화가 야기되지 않은 시를 가리킨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는 것이 정지용의 향수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 우는곳
ㅡ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란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ㅡ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ㅡ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줍던 곳.
ㅡ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엔 석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ㅡ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ㅡ 「향수(鄕愁)」, 전문.
언뜻 보아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의 전체 주지(主旨) 내지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은 화자가 그리워하는 고향이다. 그것이 이 시의 각 연 끝자리에서는 “ㅡ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진술에 그치는 것이어서, 정지용만의 몫이라고 할 언어 사용은 아니다. 정작 그만의 몫은 이런 후렴구 앞에 놓인 각 연의 본문 부분에 나온다. 구체적으로 1연에서 향수의 정은 넓은 벌을 휘돌아 흐르는 실개천으로 대체되어있다. 그리고 이어 그것은 “얼룩백이 황소가 / 헤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 우는 곳”으로 고쳐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어 2연에서는 그것이 ‘뷔인 밭에 말’을 달리는 양 소란스레 들린 ‘밤바람 소리’, 또는 “늙으신 아버지가 /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다시 3연에서는 “화살을 찾으러 /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으로 나타난다. 본래 우리가 고향을 그리는 정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일 뿐이다. 소재상태에서 감정은 느낌일 뿐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감각적 실체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지용은 그런 망향의 정을 귀에 들리고 바로 눈앞에 펼쳐진 그림이 되게 그려내었다. 그러니까 이 시를 통해 정지용은 심의현상에 지나지 않은 향수를 채색도 선명하게 그려진 그림이 되게 했고 뚜렷한 울림을 가지도록 했다. 물론 유형상 이 시는 물리시에 속한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향수」는 우리 현대 시사를 장식해준 가작, 명편이다.
제2유형의 시 ― 관념시, 또는 역사 시대상황을 수용한 시
오늘 우리 주변의 시인들을 우리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어떤 시인들은 세계와 인생, 역사에 적극 참여하려는 입장의 시를 쓴다. 그러나 어떤 시인 가운데는 그런 일을 반시(反詩) · 비예술적인 것으로 규정해 버린다. 전자에 대해 우리가 참여파(參與派)라는 이름을 쓴다면 후자와 같은 입장을 취한 시인들은 예술지향, 순수파가 된다. 그런데 제1단계에서 보여 준 정지용 시의 속성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특히 「향수」는 탈현실파의 단면을 지니는 동시에 관념이 개입되지 않은 물리시의 유형에 속한다.
정지용의 다음 단계에 등장하여 한국시단에 뚜렷한 산맥을 이룬 시인이 서정주(徐廷柱)다. 그의 시는 초기에 이미지즘-모더니즘의 시를 극복하려는 시도와 함께 이루어졌으며 그와 동시에 현대시의 한 속성인 실험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화사집(花蛇集)』에 실린 「화사(花蛇)」, 「문둥이」, 「대낮」, 「맥하(麥夏)」, 「도화 도화(桃花 桃花)」 등이 그 좋은 보기가 된다. 일제 말기에 이르기까지 서정주의 시는 대체로 이 테두리를 맴돌았다. 그의 시적 경향은 어느 편인가 하면 역사나 현실과 무관한 성격을 띠고 있었고 넓은 의미에서 순수시, 시 일체주의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를 거쳐 8·15 광복을 맞이한 다음부터 서서히 서정주의 그런 창작성향에 변화가 생겼다. 그 한 보기가 되는 것이 「풀리는 한강가에서」와 「역사여 한국역사여」 등이다.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라러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어름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둘레나 쑥니풀 같은것들
또 한번 고개숙여 바라라함인가
황토(黃土) 언덕
꽃 상여(喪輿)
떼 과부(寡婦)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번 더 바래보라 함인가
강(江)물이 풀리다니
강(江)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江)물은 또 풀리는가
─ 「풀리는 한강(漢江)가에서」, 전문.
얼핏 보아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전란을 겪고 난 다음 시인이 체험한 각박한 시대상황이다. 다섯째 연의 “떼과부의 무리들”이 그 구체적 표상이다. 식민지 체제에 처한 시대에 전쟁은 무수한 사내들을 싸움터로 몰아가서 그들을 저승사자의 밥이 되게 했다.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이민족인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전선에서 그들의 총알받이가 된 것이다. 서정주의 이 시는 거기서 빚어진 통한의 정을 바닥에 깐 작품이다.
흔히 서정주의 시에 대해 한(恨), 또는 탐미적 가락이 앞서고 현실과 생활 · 역사의식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삼스럽게 밝힐 것도 없이 문학 · 예술에서 문제 되는 역사나 현실이 우리가 일상 겪는 생활과 직접적으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주의를 본령으로 하는 소설에서 조차도 현실과 생활은 소재상태로 작품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도 그것들은 재조직 · 편성되어 시의 문맥 속에 용해되어야 한다. 하물며 시는 소설보다 더 고도의 예술적 의장을 요구하는 양식이다. 특히 현대시는 창조와 집약을 생명으로 하는 서정 단곡이 주조를 이룬다. 그런 경우에 어떤 소재 · 대상도 말의 대량 사용이 전제가 되는 진술 형태로 표현 · 부각되지 못한다. 그보다 현대시에서는 소재나 상황이 강한 인상을 주는 말들로 축약 · 제시되어야 한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풀리는 한강(漢江)가에서」와 같은 작품에 현실이 없다거나 역사가 배제되어 있다는 판단은 시의 언어가 갖는 상징적 기능을 망각한 것으로 그릇된 것이다.
여기 나오는 “떼과부의 무리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일제치하에서 우리가 겪은 우리 민족의 처절한 현실을 가리킨다.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일제는 우리 청장년들을 그들의 침략전쟁에 동원하여 방패막이가 되게 했다. 그런 사태의 결과 후방에 남은 그들의 가족 사이에 지아비를 잃은 청상들이 무더기로 생긴 것이다. 여기서 <떼 과부>는 그런 우리 민족이 겪은 일제말기의 현실을 아프게 드러낸다. 이것을 모르고 서정주 시를 역사와 현실을 외면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시 읽기의 초보에 속하는 훈련도 터득하지 못한 경우일 뿐이다. 명백히 이 작품에는 치열한 전쟁에 대한 통한, 그를 바탕으로 한 상황이나 역사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상당히 끈끈한 말씨, 고조된 목소리로 읊어 낸 것이 「풀리는 한강가에서」다. 이것은 8·15후 서정주의 시가 시 일체주의에 벗어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적어도 민족적 현실을 그의 시에 어엿하게 수용했다. 그 단적인 보기가 되는 것이 이 작품이다.
6·25 후의 서정주 시에도 사상, 관념의 한 형태인 우리 민족의 역사 그 나름의 정감으로 노래한 것이 있다. 그 좋은 보기가 되는 것이 「역사여 한국역사여」다.
역사(歷史)여 역사(歷史) 한국역사(韓國歷史)여.
흙 속에 파묻힌 이조백자(李朝白磁) 빛깔의
새벽 두 시 흙 속의 이조백자(李朝白磁) 빛깔의
역사(歷史)여 역사(歷史)여 한국역사(韓國歷史)여.
새벽 비가 개이어 아침 해가 뜨거든
가야금 소리로 걸어 나와서
춘향이 걸음으로 걸어 나와서
전라도(全羅道) 석류(石榴)꽃이라도 한번 돼 바라.
시집을 가든지, 안 상객(上客)을 가든지,
해 뜨건 꽃가마나 한번 타 봐라.
내 이제는 차라리 네 혼행(婚行) 뒤를 따르는
한 마리 나무 기러기가 되려 하노니.
역사(歷史)여 역사(歷史) 한국역사(韓國歷史)여
외씨버선 신고
다홍치마 입고 나와서
울타리가 석류(石榴)꽃이라도 한번 돼 바라.
ㅡ 「역사(歷史)여 한국역사(韓國歷史)여」, 전문.
이 경우 한국이나 조선역사는 다 같이 우리 민족의 면면한 강통을 뜻하며 단군조선으로 시작되는 역대의 민족국가를 불러일으킨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와 신라, 발해, 그에 이은 고려, 조선왕조 등이 그 내용이 됨은 새삼스럽게 밝힐 필요가 없는 일이다. 장장 수천 년을 헤아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는 유달리 굴곡이 많은 역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족국가 형태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사가 문자 그대로 동북아시아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격렬한 상황을 뜻하는 이민족과의 전란으로 점철된 바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고구려가 치른 수, 당(隨, 唐) 전역이나 몽고의 침략으로 대표되는 고려의 국난, 특히 조선왕조시대에 우리 민족이 치른 임진, 병자의 두 전란은 그 자체가 민족의 존립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이 어기찬 시대상황을 맞고 보내면서도 역사의 갈피, 갈피에 격조 높은 문화의 장을 열어내었으며 겹겹으로 나라, 겨레를 지키기 위해 한 목숨을 던진 충신열사를 배출했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대표되는 바와 같은 고차원의 문화전통도 수립했다. 이런 민족사를 자료 중심으로 정리, 체계화하는 경우 그 양은 참으로 방대하여 그에 요구되는 인력과 시간을 실로 엄청난 부피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서정주는 바로 그런 우리 민족사를 주제어로 택하여 4연 16행의 서정단곡을 만들어 내었다. 이와 아울러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이시에 나타나는 서정주 나름의 말솜씨, 또는 기법이다. 첫 연에서 서정주는 산문의 시각으로 보면 개념적인 소재에 지나지 않은 우리 역사를 “흙 속에 파묻힌 이조백자(李朝白磁)”와 일체화되었다. 그런가 하면 다음 연에서 그것은 춘향이의 심상을 곁들인 전라도의 석류(石榴)꽃이 되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3연에서 한국 역사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어엿한 여인(女人)이 되었다. 화자인 시인은 그런 우리역사에 대해 유다르게 밀도가 짙은 애정을 가졌다. 그 나머지 자신이 한 마리 나무 기러기가 되어 혼행길을 따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시가 아니면 도무지 성립되지 못하는 파격적 표현이다. 본래 시에서 유의성을 가지는 상상력은 거의 모두가 현실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터무니가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 시의 바탕이 된 상상력의 성격은 그 터무니없음이 도무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우리에게 생생한 현실로 제시되는 기적을 실현시켰다. 여기서 서정주가 빚어낸 가락 또한 일품이다. 앞에서 우리는 이 시가 우리 역사를 아득히 먼 것, 그러면서 그리우며 애틋하게 생각한 데에 제작 동기를 두었다고 파악했다. 서정주는 이 작품에서 그것을 남도와 그 하늘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성춘향의 심상, 그에 겹친 신행길의 여인, 그 변신으로 생각되는 석류(石榴)꽃 등과 일체화시켰다. 그리고는 그를 통해 의인화된 한국 역사를 채색도 선명한 제3의 실체로 제시해내기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만해 한영운의 등장: 사상, 관념의 예술화, 형이상시의 보기
한국 현대시의 형성 전개사를 기능적으로 이해하려는 경우 우리는 정지용, 서정주와 함께 또 하나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될 이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가 바로 기미독립선언문의 기초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한국 근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禪知識)인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이다. 만해에게는 1920년대 중반기에 그가 살아생전 발행한 유일의 우리말 사화집 『님의 침묵(沈黙)』이 있다. 「알 수 없어요」는 우리 시단과 문학사 맥락을 파악하려는 자리라면 반드시 집중적으로 검토, 재조명되어야 할 작품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 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 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ㅅ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 전문.
이 작품의 기능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그 의미맥락을 차분하게 검토,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의 첫째에서 다섯째 연까지의 형식상 주지는 앞에서부터 차례로 오동잎, 푸른 하늘, 향기, 저녁 노을이다. 이들 모두가 자연의 일부인 구체적 사물들임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것을 만해는 각 행의 후반부를 통해 인간의 범주에 드는 발자취, 얼굴, 입김, 노래, 시(詩) 등의 객체와 일체화시켰다. 이것으로 이 시에는 1차적인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다시 그들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떨어지는>, <지리한 장마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등의 수식어절을 거느리면서 두 번째 단계의 비유가 이루어진다. 이와 함께 이 시는 또다른 의미 맥락상의 층도 갖게 된다. 이 국면에서 비유의 매체가 된 <얼굴>과 <입김>, <노래>, <시> 등이 전자와 달리 신비스러운 느낌과 함께 매우 짙은 정신주의의 분위기를 갖는다. 이런 사실에 유의 하면서 이 작품의 마지막 연에 주목해야 한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이 부분에서 시인의 어조는 매우 단정적이어서 어떤 종교의 경전에 포함된 잠언(箴言)을 대할 때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에 반해 이 작품의 마지막 행의 문장 형태는 앞선 것과 그 구조가 사뭇 다르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이 <그칠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이다. 여기서 주지와 매체가 되고 있는 것은 <나의 가슴>이며,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이다. <나의 가슴>은 심의현상(心意現象)이지 그 자체로는 감각적 실체가 될 수 없다. 범박하게 말해서 사상, 관념의 비유 형태에 속한다. 그에 반해서 <등불>은 어엿하게 구체성을 가진 사물, 또는 객체다.
이 두 요소의 접합, 문맥화를 통하여 만해는 정신적인 범주에 드는 것과 물리적인 차원에 속하는 사상, 관념을 일체화시키고 있다. 말을 바꾸면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 또는 사상, 관념을 감각적 객체들과 대비시킴으로써 제3의 실체가 되게 했다. 이렇게 가닥을 잡고 보면 <알 수 없어요>에서 의미의 역점이 어디에 있는가가 스스로 밝혀진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이것은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평서문(平敍文)으로 이루어진 부분이다. 흔히 우리는 평서문인 경우, 그 내용 파악이 다른 유형의 문장보다 손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올바로 읽으려는 사람에게 이제까지 우리 주변을 지배해온 그런 통념은 전혀 무의미하다. 여기서 우리는 <타고 남은 재>가 어떻게 다시 기름이 될 수 있는지 도리어 강한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제기되는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는 부득이 「알 수 없어요」의 외재적(外在的)인 정보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작자는 널리 알려진 대로 당대의 선지식(禪知識)이며 고승대덕(高僧大德)이었던 한용운이다. 그는 스스로가 가진 수도, 정진과정에서 터득한 유심철학의 한 경지를 이 시의 뼈대로 삼았다. 여기서 의미 내용의 줄기가 되고 있는 것은 불교의 기본 원리 가운데 하나인 연기설(緣起說)인 것이다.
그러니까 「알 수 없어요」는 불교의 법보론에서 중심개념이 되는 인연사상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여기서 그 개념에 간략한 설명을 붙이기로 한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삼라만상을 연기사상으로 풀이한다.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인연이 있어 모이면 그것이 있음, 곧 유(有)가 되며 실체를 이룬다. 그러나 인연이 다하게 되면 여러 현상들은 흩어져서 무(無)가 되며 공(空)으로 돌아간다. 만해의 「알 수 없어요」는 이런 유무상생(有無相生), 불멸부증(不減不增),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님의 침묵』에서 이 작품이 단연 돋보이는 것은 그것이 단순하게 불교의 도저한 형이상의 경지를 노래한데 그치지 않은 점에 있다. 앞에서 이미 드러났지만 시가 사상, 관념에 의거했으면서 그것을 소재상태로 노래한 데 그친 시를 우리는 관념시라고 한다. 다시 한번 밝혀보면 관념시는 이념이나 사상을 앞세운 데 그치고 그것을 예술작품의 형성화에 요구되는 시적의장(詩的意匠)으로 문맥화시켜내지 못한 시다. 따라서 그것은 좋은 시로 평가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에 반해서 사상, 관념을 시적 의장으로 훌륭하게 빚어낸 시를 우리는 형이상시라고 한다.
랜섬에 의해 이상적인 시로 생각된 것이 사상, 관념을 알맹이로 한 가운데 거기에 신선한 감각이 깃들게 한 시, 곧 관념의 심상화가 이루어진 시다. 이것을 랜섬은 형이상시라고 정의했다. T. S 엘리엇은 이런 생각을 그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형이상시를 <사상을 장미의 향기처럼 느끼게 만든 시>라고 하였다. 앞에서 이루어진 작품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차원과 그에 대응되는 <그칠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 =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의 세계가 일체화 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으로 심의현상에 지나지 않은 <나의 가슴>이 감각적 실체가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만해가 「알 수 없어요」를 통하여 초공(超空)과, 진여(眞如), 불입문자(不立文字)의 경지를 장미의 향기처럼 느끼게 만들도록 한 기적을 실현시킨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 작품이 1920년대 중반기라는 우리 현대시의 초창기에 발표된 사실을 명기해야 한다.
형이상시의 이론에 따라 만해의 시를 살피게 되면 우리 뇌리에는 또 하나의 의문이 고개를 쳐들게 된다. 우리 근대시단에서 만해 이전에 만해처럼 제일원리의 차원을 바탕으로 삼고 아름다운 서정시를 만들어낸 시인은 달리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만해는 한국 근대시사의 초창기에 등장하여 우리 시단에 형이상시라는 값진 선물을 우리에게 안겨준 시인인 것이다. 이 놀라운 성과를 가능하게 만든 비밀의 열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이 경우에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이 만해가 주재해서 발간한 『유심(惟心)』이다. 구체적으로 『유심』 창간호에는 그 권두에 한글 시로서는 만해의 처녀작인 「심(心)」이 실려 있다.
心은 心이니라
心만 心이 아니라 非心도 心이니
心外에 何物도 無하니라
生도 心이오 死도 心이니라
無窮花도 心이요 薔薇花도 心이니라
好漢도 心이오 賤丈夫도 心이니라
(……)
心은 何時라도 何事何物에라도
心 自體뿐이니라
心은 絶對며 自由며 萬能이니라
얼핏 보아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의 중심어사는 <심(心)>이다. 본래 심(心)은 불교의 선정(禪定)에서 기본 화두가 되는 말이다. 불교 가운데도 화엄종은 <마음>을 화두로 삼고 그 해석을 통해 해탈, 돈오(頓悟), 대각(大覺), 견성(見性)의 경지를 열기를 기한다. 이때 우리에게 크게 참고가 되는 것이 당(唐)의 상찰선사(常察禪師)가 자신이 터득한 깨달음의 경지를 적어 끼치는 『십현담(十玄談)』이다. 이 유심철학(唯心哲學)의 한 경전을 일찍 만해가 해독하여 쉬운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이 있다. 그 허두의 「심인(心印)」 부분을 보면 비(批) 다음에 주(註)가 있다.
心本無體 離相絶跡 心足假客 更用印爲
마음은 본래 형체가 없는 것이라 모양도 여의고 자취도 끊어졌다.
마음이라는 것부터가 거짓 이름인데 어찌 다시 印이라는
말을 쓸 수 있으리요.
여기서 <심인(心印)>이란 심주(心珠), 심경(心境), 심월(心月), 심원(心源)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요컨대 인간 의식의 다른 호칭인 동시에 세계인식의 신경지를 열어내는 근거 단위다. 이로 미루어 이 말은 불교식 오성(悟性)을 위한 한 차원이므로 명백히 사상, 관념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의 경지를 만해는 초기 작품에서 예술적 의장을 개입시키지 못한 채 직설적인 형태로 적었다. 「심(心)」이 바로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랜섬식으로 보면 명백히 형이상시 이전의 관념시에 그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심(心)」이 1918년 말경 『유심』을 통해 발표된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해 내어야 한다.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만해는 한글을 표현매체로 한 형이상시 쓰기의 기법을 터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게 근대적인 시 쓰기에 문외한이었던 만해가 7년 뒤에 『님의 침묵』을 내었다. 거기에 「알 수 없어요」와 같은 고차원의 형이상시가 수록된 것이다. 이것은 일체의 수식어를 배제하고 말해도 우리 시단 안팎을 뒤흔든 돌발 사태였고 나아가 우리 근대시사에서 새 지평을 타개해낸 일대 기적이었다. 대체 이런 놀라운 성과가 가능했던 비밀의 열쇠는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이렇게 제기되는 의문을 풀기위해서 우리는 한국의 고전문학기 시가양식 가운데 한시(漢詩)의 갈래가 있음을 기억해 내어야 한다.
두루 알려진 바와 같이 19세기말 서구적 충격이 가해지기 전까지 한시(漢詩)는 우리 주변의 시인들이 가장 많이 쓴 시가 양식인 동시에 그 질적인 수준도 높았다. 고전문학기의 시인들 가운데는 불교의 고승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에는 자연 제1원리의 세계, 형이상의 차원이 담기게 되었다. 한글 시를 쓰기 전 한용운도 그 예외가 아니어서 일찍부터 한시의 한 양식인 절구와 율시(律詩)를 배우고 읊조렸다.
사나이 가는 곳이 어디 고향 아니리만
그 몇몇이 나그네로 시름에 젖었던가
한마디 크게 외쳐 왼 우주를 흔들려니
눈 속에 복숭아 꽃 송이송이 흩날린다.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裏桃花片片紅
이 작품은 만해의 오도송(悟道頌)이다. 불교에서 오도송이란 수도자가 정진, 참선 중에 깨친 해탈, 견성(見性)의 경지를 읊은 것이다. 만해가 터득한 견성의 경지는 <一聲喝破三千界>로 나타난다. 이 제일원리의 세계를 만해는 다음 행에서 <雪裏桃花片片紅>이라고 노래했다. 이것으로 우리는 고도의 정신세계가 흰 눈과 복숭아꽃의 붉은 빛깔로 전이되어 채색도 선명하게 감각적 실체로 바뀌게 되었음을 본다. 참고로 이 시의 제작 시기는 1917년 말이다. 이것은 이 한시가 『님의 침묵』이 나오기 9년 전에 쓰여진 것임을 뜻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만해가 한시를 통해서 「알 수 없어요」를 쓰기 전에 이미 제1원리의 세계를 작품화할 기법을 터득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검토해 볼 또 하나의 과제가 있음을 느낀다. 불교의 오도송에 나오는 말은 워낙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그 나머지 그 기법이 혹시 우연의 결과가 아닐지 의혹을 일으킬 여지가 생긴다. 이렇게 일어나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만해의 또 다른 작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우주의 무궁한 조화로 하여
옛 그대로 절집 가득 매화 피었다
고개 들어 삼생(三生)의 일 물으렸더니
유마경 읽는 사이 거의 진 꽃들
― 「매화꽃이 짐에 생각이 있어」
宇宙百年大活計
寒梅依舊滿禪家
回頭欲問三生事
一秩維摩半落化
― 「觀落梅有感」
이 작품의 일차 소재에 해당되는 것은 봄날 절집 뜨락에 가득하게 핀 매화꽃이다. 물리적인 차원이라면 그것은 나뭇가지 위에 꽃이 핀 일이며 자연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만해는 이 행에 앞서 <宇宙百年大活計>라는 구절을 선행시켰다. 이것은 이 시의 으뜸 제재가 물리적 차원, 또는 자연 그대로의 범주에서 벗어나 어엿하게 사상 관념, 그것도 제일원리의 차원에 이른 정신세계를 거니리고 있음을 뜻한다. <回頭欲問三生事> 이하는 그런 정신의 경지를 더욱 확충하여 공고하게 만든 부분이다. 이것으로 이 시는 만해가 평생을 걸어 화두로 삼은 불교의 제일원리에 바탕을 둔 것이 되었다. 그런 선지식이 여기서 봄날 절집에 가득 피어 넘치는 기운으로 봄을 알리는 매화와 일체화가 된 것이다. 그와 아울러 <一秩維摩半落化>로 이 한시는 유심철학의 높은 경지를 장미의 향기처럼 느끼게 만들어 내었다. 『님의 침묵』 이전에 이미 만해는 이렇듯 형이상시를 만들 수 있는 기법상의 요체를 터득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명백하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알 수 없어요」와 같은 작품을 만해가 만들어낸 비밀은 그것을 기적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만해는 한시의 전통에 우리말이 가지는 맛과 느낌을 접합시킴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고전적 유산인 「알 수 없어요」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한시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이미 거듭 확인한 바와 같다. 그것은 우리문화와 문학사에 나타나는 가장 높은 산맥이며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흘러내린 푸른 가람이다. 우리는 뜻밖에도 『님의 침묵』의 내용과 기법 속에 그런 한시의 줄기가 듬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것으로 우리는 한국 근대시의 구조 속에 전통문화의 뿌리가 매우 넓게, 그리고 깊숙하게 뻗어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