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기 친구들!
새해 복
많이 받기를…
이제 며칠 있으면 구정이 오니 꼼짝 없이 또 한살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지난 12월 마지막 토요일 에 남가주 8기 친구들10명이 모여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2년 동안 기장으로 수고 해 준 한을영 이 임기를 끝내고 다음 기장에게 일을 인계 하였다. 을영이 건강도 좋지
않은데 수고 많이 했다. 16명 으로 시작 했던 만남 이었다. 지금은 서울로 간 문 윤분, 타주로 이사한 박원실, 한영성, 그리고 강순영,
이명숙, 박 희주는가 빠지고 10명의 동기들이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앞으로 남은 삶을 건강하게 살자고 했다.
미국에 다시 들어와, 처음 만났던 동기들, 그때 기장은 강 순영이었고, 다음으로 염정자가 2년, 이상숙이 1년 그리고 내가 2년
했고 다음은
한 을영이 기장이 되어 2년 수고 했고 기장을 선출 하게 되었다. 동기 들이 돌아가며 기장을 하기로 했지만 막상 기장을 뽑자니 모두 사정이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 할수 없이 처음으로 돌아가 염정자 상숙, 그리고 나, 셋중에 다시 한번씩하자는 의견에 정자, 상숙은 사정이 있어,
2번의 기장을 다시 맞게 되었다.
첫번째 나의 임기 중에 LA, 국제 총 동문회가 있었다. 서울에서 명인실, 백경옥, 이 정희, 백
문애 그리고 오래곤 주에서 온 이경자 친구들과
즐거운 만남을 가졌었다. 국제 동문회가 끝나며 나의 임기도
마쳤고, 그후, 사정으로
2년간을 집에서 쉬었기에 받아 드렸다
.
2년후, 다시 만난 친구들은
친구가 아닌 가족이었다. 그동안 을영이 즐겁게 진행 하였다. 역시 모범 생이었다. 만날 때 마다.
삼행시,
친구들의 칭찬, 낙서 생일 축하등… 모든 것을 자료로 만들어 인계를 해 주며 나에게 숙제를 내 주었다. 그 자료로 책을 만들어 기념으로
한 부씩을 주라고 한다. 전 기장의 부탁 이니 자동차 운전도 내려 놓은 나에게는 큰 일 인데, 그래도 하라는것에 순명 해야 되니 해야지.
오늘 그 자료를 훑어 보니, 재미 있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귀찮아 했던 마음이 미안했다. 삼행시 까지는 나도 참여를 했는데…
몇 종목은 나의 휴식 기간 중이라
내 글이 없음에 섭섭한 마음도 생긴다. 그것은 함께 하지 않은 나의 몫인데도 아쉬움이 가득
하다.
‘기장을 하니, 이런 즐거운
일도 있구나’ 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몇장의 글이라도 묶어 보련다.
옛날, 58년 전, 1956년
졸업 하기 전, 친구들에게 돌린 싸인 지를 생각 하며 그렇게 하리라. 1950년 6월 5일 후암동 교정에서 입학 식때
만난 우리 8기 친구들, 20일 만에 6.25 동란으로 부산으로, 대구로. 각
지방으로 흩어 졌다가 고등학교 2학년때 비로소 후암동 교정으로
복학 했던 우리들, 그때의 추억이 아련히 떠 오른다. 그때는 우리는 어린 소녀 들이었다. 그 소녀 들이 58년 지난 지금 할머니가 되어
다시 그 시절을 추억 할수 있음도 축복 이다.
긴 세월 지난 오늘 8기 친구들과 의 인연을 생각 해 본다.
1978년 미국으로 갔다가 1988년 한국으로 돌아 가 몇년후, 8기 동문들과 만남의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이흥윤 회장, 명인실 부회장,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 총무 (생각이 가물, 가물) 그리고 운영 위원들… 운영위원들은
18명으로 기억 한다. 그중에 나도 한 사람 이었지.
1997년 환갑 여행은 일본 센다이로…다음은 국제 동문회, 그리고 김 진수 총 동문회장 시절 후암동 본교가 대방동으로 이전 할 때,
우리는 모금 운동도 함께 했었다..
이제는 추억속에 남겨진 일들, 모금을 하기 위해. 인실이 남편,장군님 께서 손수 쑤어 주셨던 ‘호박죽’의 추억도, 강남의 초당 두부집,
반포 식도락, 아들 딸들의 결혼식, 산악회 를 따라 이곳 저곳 다녔던 추억들. 모든것은 그리운 추억이 되어 가슴에 남겨졌다. 그때의
아들 딸
들이 지금은 부모가 되어 그들의 아들, 딸들이 생겼고, 그동안
세상을 떠난 친구들, 이제 건강이 좋지 않은 친구들, 모든것
다
놓고 가야 할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모든것 다 잊고 남은 삶을 살다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