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만에 흘리는 눈물 박영민062014.06.10 18:38:30 조회1161 <style type="text"> </style> 2014년 오월. 64년만에 아버지의 사랑을 갚을수 있는 뜻깊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의 모교이자 몸담았던 학교에 아버지이름으로 장학 기금을 기부하게 되었다. 아버지 ( 박장렬 교장 선생님) 는 조선 총독부 산하 공업 전습소 ( 서울공대 전신 ) 와 동경제대를 나온 공업분야 전문가로 미군정 사령부에 발탁되어 해방후 서울 공고 첫 한국인 교장 선생님으로 취임하셨다. 그당시 서울공고는 한반에 서울대를 열명정도 보낸 수재학교였다고 한다. 한국전쟁당시 학교로 피난 트럭이 오자 아버지는 가족을 내버려둔체 선생님들과 중요서류를 우선 트럭에 태워 부산으로 내려가 교육을 계속 하게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서울에 남아 학적부등 중요자료등을 땅에 묻고 숨겨 놓게 하셨다. 이런 모범적인 교장 선생님을 본받은 선생님들이 피난지에서도 서울공고에 열의를 다하셨고 이는 전쟁이 끝난후 학생들에게 까지 전해져 귀감이 되었다. 뒤늦게 가족들과 피난길에 올랐던 아버지는 피난시절 자식들에게 " 피난민은 한그릇의 밥을 다먹어서는 안된다. 반그릇만 먹자 " 할 정도로 절제하는등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곳에 있는 대원군 사당에 매일 애국지사가 와서 고문당하는 모습에 정신적 충격과 영양실조로 그토록 사랑하던 모교와 가족을 가슴에 묻은체 숨을 거두셨다. ( 1950. 9.5) 만약 그때 아버지가 부산으로 가는 피난트럭을 타고 가셨으면 어떻게 되셨을까? 아버지가 꿈꾸시던 과학과 공업을 꿈꾸는 밝은 미래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시고 가족들도 힘들지 않았을텐데..... 모교를 위해 이승만대통령이 상공부 장관과 교육감 추천을 하셨지만 끝까지 교육계에 남기를 원하신 아버지. 일제 치하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아버지, 동경제대 시절에도 유학생 사이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남몰래 노력하셨던 아버지.... 학교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흔적과 아버지를 기억하는 80 대의 노제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자꾸 눈물이 났다. 이제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이 너무 어려서 되돌려 드릴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아버지의 꿈이 담겨있던 학교를 통해 작게 나마 보답할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 < 서울공고 백년사 참조 >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등록일 조회 546 백합동문회보 원고청탁입니다. 양윤애23 2014-09-26 763 545 남산에서4 박영민06 2014-08-31 1024 544 [re]여름산책3 박춘지20 2014-07-30 913 543 여름산책2 박영민06 2014-07-22 1021 542 [re]영민언니의 여든번째 생신을 축하드립니다6 박춘지20 2014-06-20 1112 541 영민언니의 여든번째 생신을 축하드립니다6 박춘지20 2014-06-14 1484 64년만에 흘리는 눈물7 박영민06 2014-06-10 1162 539 오월의 봄나들이7 박영민06 2014-06-06 1253 538 윈스턴 처칠경의 뛰어난 유머1 이복희17 2014-05-24 891 537 미카사의 꽃들입니다9 박춘지20 2014-05-22 1227 536 '아침 꽃배달입니다'5 장금자14 2014-05-22 1108 535 외국인에게 너무도 이상한 한국말 몇 가지2 이복희17 2014-05-21 971 534 엽기할머니 이복희17 2014-05-21 836 533 어떤 답 이복희17 2014-05-13 845 532 당신 말한테서 전화 왔어~~ 이복희17 2014-05-13 874 이전1…567891011121314…45다음 제목 내용 제목+내용 댓글 이름 닉네임 아이디 검색
64년만에 흘리는 눈물 박영민062014.06.10 18:38:30 조회1161 <style type="text"> </style> 2014년 오월. 64년만에 아버지의 사랑을 갚을수 있는 뜻깊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의 모교이자 몸담았던 학교에 아버지이름으로 장학 기금을 기부하게 되었다. 아버지 ( 박장렬 교장 선생님) 는 조선 총독부 산하 공업 전습소 ( 서울공대 전신 ) 와 동경제대를 나온 공업분야 전문가로 미군정 사령부에 발탁되어 해방후 서울 공고 첫 한국인 교장 선생님으로 취임하셨다. 그당시 서울공고는 한반에 서울대를 열명정도 보낸 수재학교였다고 한다. 한국전쟁당시 학교로 피난 트럭이 오자 아버지는 가족을 내버려둔체 선생님들과 중요서류를 우선 트럭에 태워 부산으로 내려가 교육을 계속 하게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서울에 남아 학적부등 중요자료등을 땅에 묻고 숨겨 놓게 하셨다. 이런 모범적인 교장 선생님을 본받은 선생님들이 피난지에서도 서울공고에 열의를 다하셨고 이는 전쟁이 끝난후 학생들에게 까지 전해져 귀감이 되었다. 뒤늦게 가족들과 피난길에 올랐던 아버지는 피난시절 자식들에게 " 피난민은 한그릇의 밥을 다먹어서는 안된다. 반그릇만 먹자 " 할 정도로 절제하는등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곳에 있는 대원군 사당에 매일 애국지사가 와서 고문당하는 모습에 정신적 충격과 영양실조로 그토록 사랑하던 모교와 가족을 가슴에 묻은체 숨을 거두셨다. ( 1950. 9.5) 만약 그때 아버지가 부산으로 가는 피난트럭을 타고 가셨으면 어떻게 되셨을까? 아버지가 꿈꾸시던 과학과 공업을 꿈꾸는 밝은 미래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시고 가족들도 힘들지 않았을텐데..... 모교를 위해 이승만대통령이 상공부 장관과 교육감 추천을 하셨지만 끝까지 교육계에 남기를 원하신 아버지. 일제 치하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아버지, 동경제대 시절에도 유학생 사이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남몰래 노력하셨던 아버지.... 학교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흔적과 아버지를 기억하는 80 대의 노제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자꾸 눈물이 났다. 이제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이 너무 어려서 되돌려 드릴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아버지의 꿈이 담겨있던 학교를 통해 작게 나마 보답할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 < 서울공고 백년사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