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닥 높지않은 부드러운 봉우리들로 폭 둘러싸인 선운사가 참 정겹다.
관광지마다 온갖 식당들, 잡화점, 노점상들이 즐비한 요즘 세태에, 드물게 주차장(입구)에서 바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과 아담한 사찰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옛 시인들이 읆조리던 붉은 동백꽃이 없어도.. 살랑대는 꽃무릇이 없어도.. 별천지같은 단풍철이 아니어도.. 아름드리 나무숲 만으로도 선운사는 충분히 빼어나다.
저녁 후 산책길.
중심을 흐르고 있는 선운천에 투영된 나무들은 맹그로브 숲인 듯 아닌 듯, 색채를 뺀 루소의 그림인 듯 아닌 듯, 면경 같은 검은색 물 위에 비친 괴기스런 나무 모습들이.. 몽환적이다.
눈 쌓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4계절에 한 번씩 와 보고 싶다.
우리들만이 선운사를 전세 낸 듯 아무도 없는 산사의 고적함을 즐기며 차밭을, 꽃밭을, 숲길을 온몸으로 뛰고 걷고 즐기다 들어간 넓은 숙소에는 8명이 함께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기에 충분하고 정갈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건강얘기가 제일 먼저다. 어디 어디에는 무슨 무슨 음식이 좋고.. 체조, 헬스, 댄스 등을 시범을 보이고 따라 해 보고.. 패션 모델의 걸음걸이까지 마스터하고....
내년, 팔순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경순의 팔순잔치를 어떻게 할까? 녹슬어버린 머릿 속 지혜를 짜내고 짜내봐도 '기념여행' 말고는 마땅한 자축방법이 없음을 아쉬워한다.
똑같은 생일케익의 촛불을 내년에는 혼자 불어 끄고, 다음 해에는 일곱 명이, 그 다음 해에는 둘이서 불어끄면 불공평하다느니 아니라느니.. 케이크 크기가 달라야 한다느니 아니라느니.. 저마다 한마디씩 와글와글, 시끌시끌, 까르르르...
얼마나 더
모두모여 얼굴 마주보고 정스런 이야기에 가슴 푸근해지는 이같은 날들을 누려볼 수 있을까?
산사의 밤이 저 혼자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