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에서 4월 어간에
길을 걷다가 문득 한 그루 나무에 눈길이 머문다. 메마른 나뭇가지들이 추워 보인다. 흐린 하늘로부터 찬바람이 불어오는 2월. 그런데 뜻밖에도 올망졸망 맺혀 있는 봉긋한 망울들이 눈에 들어온다.검은 나뭇가지 끝에 엇박자로 돋아난 그것들은 갸름하고 통통하게 부풀어 있다. 갈색을 띤 잿빛 몸통에 은빛 털이 보송하게 덮여 함함한 것이 꽃송이 못지않게 어여쁘다.
헐벗은 나무는 아무 정보도 주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꽃이 필 것이라는 예감은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저 망울을 시작으로 개화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진 것은. 꽃이 필 즈음에야 나무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은 아예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으니 진이 좀 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2월의 나머지 날들을 새로운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하고 3월이 왔다.
3월이라고 금방 햇살이 따스해지는 것도 아니고, 바람 끝이 순해진 것도 아닌데 내 기대는 더 커졌다. 별다른 변화 없이 그렇게 3월도 가고 4월 중순이 가까운 어느 날, 마침내 드러낸 속살. 이제 마음을 열어줄 때가 되었다는 듯 제법 연싹싹한 자태였다. 부풀대로 부풀어 저절로 풀어헤쳐진 망울의 앞섶. 껍질을 비집고 배시시 내민 꽃봉오리. 꽃잎들은 아직 겹으로 단단하게 포개져 아주 연한 노란색을 머금은 우윳빛은 부끄러움 같았다. 망울이 커지며 짐작은 갔지만 역시 목련이었다.
봉오리는 꽃받침에서부터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며 부풀다가 갈수록 날렵하게 좁아지더니 섬세한 붓끝처럼 뾰족하게 휘어져 마무리 되었다. 서둘러 카메라에 담는 내 손끝이 떨렸다. 흥분인지 희열인지 고마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도타운 꽃잎들이 살며시 서로 벌어지며 탐스럽게 온전한 송이를 이루어 나무를 가득 덮었을 때는 한 그루의 환한 꽃불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기품에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눈이 부신 꽃, 목련. ‘무구한 순결’이'라는 개념이 눈앞에서 형상화되는 듯싶다. 하지만 목련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비현실적인 느낌은 여전하다. 지고지순의 절정은 너무 짧아서 덧없지 않던가. 목련은 언제 봐도 환幻이고 꿈이다.
고백하자면 목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4월만 되면 왕왕 울려대는 멜로디, ‘오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여기서도 저기서도 가곡이 끊이지 않고 들린다. 그런가 하면 아주 처연한 목소리가 ‘하얀 목련이 지이네~’ 목 놓아 부르면 대중들은 하염없이 젖어들고 만다. 흔해질 때 그 존재는 시들기 십상이다.
순전히 취향의 문제겠지만 목련은 많은 사람들이 보내는 찬사로 오히려 친밀감이 가지 않던 꽃이다. 게다가 떨어진 꽃잎은 보지 않는 게 좋다. 지는 모습으로 치면 생생한 모습 그대로 똑 떨어져 버리는 동백이나 능소화에 비해 한 수 아래라고나 할까. 그 비밀을 알 수는 없지만 목련의 낙화에서는 늘 ‘미련’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된다. 절정의 순간이야말로 미련의 단초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지저분하고 차라리 처참한 지상의 꽃잎들을 보면 생의 그래프를 생각하게 된다. 삶의 정점은 맛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 어쨌든 절정의 시간은 언제나 짧고 세월은 무정하다. 우리는 얼마나 순탄하고 자연스럽게 하향선을 그릴 수 있을까.
2월부터 4월까지 그렇게 ‘목련의 시간’을 따라가 보았다. 수줍게 꽃눈이 트이고 생의 열정을 남김없이 불태우듯 만개의 기쁨까지 같이 했지만 낙화의 때에 외면했던 내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과 우연히 연애라도 한 것 같았던 날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 했던가. 내 문서와 사진파일에는 무심을 유심으로 이끌었던, 목련의 한 생生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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