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도서...랩소디 인 베를린
2010.04.05 19:58:47 조회377
*** 내가 소속해 있는 소설스터디를 지도하시는 분이 구효서작가야. 이번에 출간한 "랩소디 인 베를린"은
윤이상씨를 모델로 쓴 소설이거든. 내용도 깊고 민족의 방황, 예술의 내면을 알 수 있는 수준 높은 작품이야.
꼭 읽어 보길 바래.
개인적으로 내용중 가장 마음을 울리는 구절은 "저를 데려가세요. 제발"이야. 가슴이 시린 대목이기도 하고.
구효서씨 새 장편소설 '랩소디 인 베를린'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왔어. 끝없이. 해국(海菊) 꽃잎과 이파리가 하염없이 나부꼈어. 네 셔츠와 스카프도 그랬어.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길이 끝날 때까지. 두 시간 동안 멈추지 않았어. 우린 말없이 걸었어. 길고 먼 길을 걸었어. 온통 흔들리는 보라색과 연둣빛이었어. 네가 보였다 안 보였다 했어. 연둣빛 안구에 보라색 동공. 내 눈이 그렇게 물들었을 거야. 들이쉬는 숨은 연둣빛이고 내쉬는 숨은 보라색이었어."(112∼113쪽)
구효서(53)씨의 새 장편소설 '랩소디 인 베를린'(문학에디션 뿔)의 바탕색은 보랏빛이다. 이 바탕색은 시적인 분위기를 돋우면서도 소설의 말미를 감동적으로 덧칠하는 중요한 빛깔이다. 머무르고자 하나 떠도는 자의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아픔에다 세월의 부식에 저항하는 사랑의 힘을 굵게 음각한 소설이다.
김상호 혹은 겐타로라는 이름의 남자, 재일 한국인으로 태어나 독일에 건너가 음악을 공부하다가 힌터마이어라는 조선 핏줄이 섞인 중세 음악가의 자료를 찾아 평양에 갔다온 죄로 한국에서 17년간 감옥살이를 해야했던, 독일 이름으로는 토마스 김이라는 그 사내. 이 사내가 젊은 시절 일본에서 하나코라는 여자와 보랏빛 사랑을 한 것인데, 그들은 이후 40년간 헤어져야만 했고 뒤늦게 사내의 자살 이유를 찾기 위해 독일 땅을 밟은 옛 연인의 움직임과 대화가 이번 소설의 기둥이다.
◇중세의 사랑과 현대의 사랑을 병치시키면서 '경계인'들의 슬픈 디아스포라를 아우른 소설가 구효서씨. 그는 이번 소설에서 "파토스에 휩쓸리지 않고 사랑에 고루 균형을 잡아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면서 "민족 국가 역사 지역 같은 개념들이 두 남녀의 사랑 속에 애틋하게 녹아들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액자 형식으로 또 하나의 굵은 이야기가 끼어든다. 배경은 중세 독일. 파이프오르가니스트 아이블링거는 파이프오르간에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장이에 불과했던 힌터마이어라는 사내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집에 거두어들여 비천한 신분까지 세탁해준다. 아이블링거는 여동생 레아를 사랑했고, 그 레아를 힌터마이어가 사모했으니 김상호와 하나코의 관계와 더불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쌍곡선이 형성된다. 음악적 영성을 가운데 둔 예술가 이야기이면서도 깊은 구멍처럼 아득하나 장작불처럼 뜨거운 정념이 이 액자소설에 가득 흘러간다. 힌터마이어는 먼 뿌리가 조선에 닿아 있는 것으로 암시되는데, 이러한 설정이 아니더라도 신분의 경계를 넘나들고 감정의 경계에 서 있어야만 하는 그 또한 김상호처럼 경계인이요, 디아스포라(離散)의 아픔을 겪는 상징적 존재인 셈이다.
김상호라는 캐릭터는 동백림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재독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을 떠올린다. 실제로 작가는 후기에 "정작 선생의 작품과 생애에 혹독히 빚졌으면서도 선생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선생의 존재가 너무 커 김상호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념이나 정치적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작가는 그 점을 우려해 굳이 윤이상이라는 인물을 피해갔을 터이다. 작가의 관심은 근대 이후 민족이나 국가, 지역이나 이데올로기 어느 부분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그 틈새를 떠도는 많은 영혼들에게 닿아 있다.
김상호가 하나코를 조용히 떠나 독일로 갈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그를 수용할 수 없었던 하나코의 아버지가 있다. 만주에서 조선인들을 학살했고 첩보부에서 조선 청년들을 수없이 죽였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딸에게서 떠날 것을 부드럽게 강요하는 하나코의 아비 앞에서는 김상호, 겐타로의 보랏빛 사랑조차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67세의 나이로 자살하면서 40여년 저쪽의 연인에게 남긴 "내가 늘 찾던, 내가 평생 가닿고자 했던 곳이 하나코였다"는 유문은 사랑을 뛰어넘는다.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한 여인을 뛰어넘어 '하나코'라는, 민족이면서 국가이고 이데올로기이면서 지역일 수도 있는, 편견과 가름이 무화된 절대 평화의 공간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40여년이 흐른 후 겨우 찾아간 연인의 무덤 비석을 보고 늙은 하나코는 격정을 삼키며 울었다. 비석에는 망자의 이름도 없이 다만 '5P 3/10'이라는 암호 같은 글자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열여덟 살 가을에 둘이서 짚어냈던 보라색의 색상배열체계 기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