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로 시작해 동사에 이른다면
2010.05.19 02:21:50 조회713
어제 영화 "시"를 봤다.
나이들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후의 날을 두려워 한다.
그 두려움의 대상은 병에 걸린 자신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떤 병명일까.
치매다.
누군들 걸리고 싶겠냐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병에 드는 거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윤정희가 맡은 역할을 다른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를 생각했다.
그 역할은 윤정희의 맞춤형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창동이 그 많은 여배우들중 왜 윤정희를 택해 영화를 만들었는지
분명히 알수 있다.
적당한 교양, 손대지 않은 얼굴이 만든 디테일의 표정연기.
함축성과 절제가 섞인 시나리오.
앵글이 포착한 장면들.
철저하게 시간과 묘사를 계산해 만든 영화다.
나도 모르게 참 잘만들었네, 역시 이창동이네, 라고 저절로 흘러나온다.
영화의 대사중 이런 것이 있다.
자꾸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윤정희가 정밀검사를 받았다.
의사가 단어를 잊지 않느냐고 물었다.
윤정희는 대수롭지 않는 표정으로 어쩌면 당연한 것 인양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부분에서 윤정희의 표정이 무척 섬세하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아니면 당연한 과정이 뭐가 어떠냐는 식의 어투였다.
의사는 처음엔 명사가 생각나지 않고 차츰 동사까지 잊어버린다며
그것은 바로 알츠하이머 즉 치매라고 한다.
충격과 슬픔.
유연하게 그 이후를 결정짓는 단서들.
사물을 짧은시간에 아웃포커스기법으로 카메라가 잡아낸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 장면을 놓칠 수도 있지만 키포인트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영화는 시 같았다.
일상에서 아주 작은 이야기거리를 찾아내어 이어가는 잔잔한 시다.
모처럼 여운이 강한 영화에 한참은 빠질 것 같다.
깊은 상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