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같던 엄마
2009.08.06 13:39:09 조회653
들꽃같던 엄마
우리 엄마는 산업사회 이전의 자연인의 모습으로 늘 내게 다가온다.
40대 후반까지 쪽을 지고 비녀를 꽂은 단정한 모습에, 겨울이면 회색
기지 두루마기를 한복에 곱게 받쳐 입고 가벼운 새처럼 걸으셨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서방님 따라서 시집가는 아씨의 모습 같았다. 여기
던가 저기던가 찾으며 인고의 결혼생활을 하신 엄마.
허약한 체질의 엄마는 들꽃처럼 몸이 가녈프고, 입이 짧고 소식가 체질이었다.
게다가 외가댁의 단명 내력으로 우리 형제들은 엄마가 아프면 큰일나는 줄 알았다.
특히 49세와, 59세 땐 아홉수를 두려워하며 벌벌 떨었다.
형제 7명에 부모님과 일하는 언니까지 고정 멤버는 늘 10명, 거기에 객식구가 끊이질
않아, 집이 아니라 무슨 기차 간이역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아침 4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부지런히 식사준비하고 온종일 숱한 집안일하시다가
초저녁 잠이 많으셔 일찍 주무실 땐 코를 많이 곯았다. 우리집은 서울에서도 시골처럼
안방에 군불을 지피고 물을 데우고 밥이나 국 등을 끓일 수 있는 큰 가마솥이 부엌에
걸려 있었다.
그 옆에 연탄 아궁이가 또 따로 있었고, 부엌은 전형적인 한국 가옥에 따라, 대청마루를
지나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 위에 다락방이 있었다. 수도는 바깥 마당에 있었으니 하루
동선이 복잡해 잔걸음 많이 치고, 아버지, 어머니 한복에 이불 호청등 다듬이질 하랴
자식들 도시락도 한두개가 아닌데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니, 거의 모든 음식을 매일
새로 해서 먹어야 했으니, 소처럼 일했다고 할 수 있다.
가끔 기력이 똑떨어져 엄마가 축 늘어지면 큰언니가 긴급 조치를 취해 엄마를 살려내곤
했다.
바로 통닭구이 한 마리와 잠깐의 휴식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엄마는 곧 일어나셨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때는 엄마가 꾀병부린 게 아닌가 철딱서니 없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엄마 체질을 닮아 너무 지쳐 입맛을 잃고 밥을 못먹다 영양실조에 과로까지 가면 그때
엄마처럼 영양을 공급해주면 금방 생기가 돌았다.
어쨌든 엄마의 건강을 위해 우리가 한 일은 엄마의 육신 곳곳을 형제들이 여기저기 주물러 드린 것이다.
그 전통이 손자,손녀에게도 이어져 그저 할머니만 만나면 손을 만지작거리고, 어깨며 팔다리를 주무르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심지어는 학교이모가 맨날 피곤해 하니, 조카들이 나에게도 달려와 주물러 댄다.
나는 아파서 극구 사양을 했지만...
우리 엄마는 남에게 싫은 소리, 싫은 표정, 쓴 소리 한번 안하고 평생을 사셨다. 엄마의 얼굴은 늘 보살님
같았다. 자식들에게도 이거해라, 저거해라 한번도 명령하신 적이 없다. 그저 언제나 인자하고 부드러운
분였다. 자식뿐 아니라 친척, 이웃간에도 똑같았다. 그래서 엄마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저 착하고, 좋은 분이라고 이구동성 박수를 친다. 숱한 조카들도 다 건사한 셈이고, 서모로 들어오신
오갈데 없는 작은 할머니까지도 거두셨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다는 표현을 잘쓴다.
작으마한 키에,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의 모습, 이쁘지도 밉지도 않은 얼굴이지만 천사의 모습이 담긴
내 어머니.... 잘생긴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언제나 조신하고, 침착하고 서두르지 않고
한번 먹은 마음 변함이 없고, 내 욕심을 전혀 안부리고 남을 배려하는게 몸에 밴 천사표의 울 엄마.
엄마의 개인적인 볼일이라면 절에 열심히 다니신 것 뿐이다. 절에 가시려면 목욕재개하시고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언제부턴가 새벽에는 꼭 불경을 독경하셨다. 목소리가 어찌나 맑고
낭랑한지 우리 엄마가 저런 면도 계셨네 감탄했다. 겨우 한글을 떼신 정돈데 뜻도 어려운 금강경을
어찌 외우셨는지 모른다. 마하반야 바람일다...음조도 꼭 스님처럼...
하긴 뜻이 무슨 소용인가, 마음이면 통하지. 그래서 명승 원효도 저자거리에서 글모르는 중생들을
위해 그저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만 외치게 한 것이다.
막내딸이 결혼이 늦어도 한말씀 안하시더니, 언제부턴가 내가 집에 없으면, 내방에 불경을 틀어놓곤 하셨다. 당시 전축이 커트리지라 비디오 테잎만한 크기를 전축에 밀어넣기만 하면 되었지만, 엄마 기술로 그게 가능했던 모양이다. 내방과 붙어있는 세를 준 미장원에서 머리를 하다가 결혼한다는 말이 나오자 미용사 언니가 감탄을 한다. “어머니가 그렇게 열심히 불경을 틀어놓으시더니, 지성이면 감천인가 보다” 라고 한다. 어머니는 나름대로 하늘과 통한 분인지도 모른다. 자식들이 빗나가지 않고 잘 컸고 그게 우리 엄마의 소원였으니 말이다.
39세에 막내 아들을 두셨는데, 늦둥이 교육비가 아무래도 주위에 부담이 되니 엄마는 결단을 내렸다. 둘째언니 가게 옆에다가 노점상을 벌린 것이다. 아무리 말려도 당신이 꼭 하고 싶은 일이라 하여 우리 형제는 엄마의 개업을 축하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당신이 번 돈으로 막내 아들 책값도 주고 용돈도 주면서 생기가 돌던 엄마...이른바 알바생인데 수익은 엄마가 다 챙기겠다는 기발한 착상은 아들을 위한 일구월심에서 비롯되었지만 참 놀라운 경영능력이다. 엄마의 이런 지혜는 곳곳에서 늘 보여졌다. 어릴때 얘기 책을 많이 읽은 탓인지 한석봉이나 맹자 엄마와는 차원이 다른 자연 순리에 따른 힘뺀 교육관으로 우릴 키웠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장 자크 루소의 자연적 교육 철학과 맥을 같이 했다. 놀라운 혜안이다. 하긴 가장 평범한 것이 진리일진데, 엄마는 천성이 자연인이었고,그 천성대로 순리를 따른 것일 뿐였을 테지만..... 그게 우리 형제를 방목한 것 같이 보이지만 부모 틀에 길히지 않고 개성적인 자유와 능력을 각자 찾을 수 있게 했다. 그래서 난 자유로운 방목으로 자라 나만의 독립성을 키울 수 있었다고 자랑으로 말한다. 루소의 교듁방식대로 우린 자란 것이다. 영광이다.
그 막내가 박사를 따자, 엄마는 꼬깃꼬깃한 쌈지돈을 털어 박사 까운을 손수 준비했다. 그리고 거하게 온식구들 식사까지 한턱 쏘셨다. 그때가 엄마의 최고 전성기다. 막내 사위가 박사 딸 때 박사 까운을 엄마에게 입혀드리려고 하자 엄마는 뒤로 물러섰다. 사돈댁에게 입혀드리라고 극구 사양했다. 그러더니 막내가 까운을 입혀드리고 금술 모자를 씌우자 엄마는 기꺼이 입고 함박같은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박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우리집에서 함께 살았다.그 전에는 한정거장이 더 되는 엄마 집에서 우리집으로 일년 열두달 하루도 안빠지고 새벽녘에 출근하셨다. 비가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아프거나 상관없이 칸트처럼 정확한 시간에 우리집 문턱에 당도하셨다. 그런 믿음을 보여준 엄마...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엄마는 늘 우리에겐 안심과 안전지대였다.
주말에, 애들과 함께 나들이가면 엄마는 초롱초롱해진 눈빛으로 창밖 풍경에 시선을 박았다. 새세상 보듯 감동하시며... 바깥 바람 쐬는 게 너무 좋아 차안에서 조는 일이 절대로
없다. 끝까지 바깥구경을 한다. 여름 휴가때도 모시고 가도 비치 파라솔에 앉아 하염없이 파도치는 바다를 보며 소녀처럼 가슴을 설래는 모습이었다. 전가족이 함께 자주 야유회를 가도 엄마는 소녀처럼 상기된 얼굴로 즐겼다. 너무 이쁜 엄마...착한 엄마... 감성이 풍부한 엄마였다.
대충 짐작으로 음식을 해도 가족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그 맛을 잊지 못했다.
된장 간장 고추장 맛이 잎품였고, 동치미 맛이 사이다 맛이 났다. 결혼한 아들들도
엄마의 맛을 그리워 우리집으로 자주 모여들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엄마의 손맛을
잊지 못하고 먹고 갈땐 생기가 돌았다.
일년에 고춧가루가 30근 필요한 줄 알고 제일 좋은 태양초로 장만해드린다. 살림을
모르고 관심도 없으니 엄마가 다 알아서 하시니 그런 줄 알았다. 우연히 얘기 중에
30근 말이 나오자 시어머니가 깜짝 놀란다. 결국 엄마가 고추장을 담아서 아들들에
게 다 나누어 준 것이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나... 우리 엄마가 그 정도는 하실 만
한데,,, 단지 말을 안했을 뿐... 우리 엄마도 깔깔 웃으셨다. 시어머니보다 10살이 더
많으신 엄마는 시어머니와도 구수한 정담으로 친하게 잘 지냈다. 시어머니는 반말도
가끔 했지만 엄마는 꼭 존대말만 쓰셨다. 그게 몸에 배인 분이고 시어머니는 서글서
글한 성격이라 연령차를 별로 고려안하고도 서로 친했으니...
단명할까 온 가족이 전전긍긍하던 엄마는 7순 잔치를 하며 기생도 부르고 흥에 겨워
시조도 읊으셨다. 춤도 덩실덩실 추셨다. 온가족,친척들,막내 아들의 장인 장모님도
오셔서 밤늦도록 자릴 함께 했다. 성산 대교 근처에서 했는데, 밤 강물이 불빛에
반짝이며 유난히도 행복해 보이던 밤이었다. 8순 잔치는 더 근사하고 멋들어지게
해드리겠다는 자식들의 뜻을 어기고, 79세에, 1년 전에 먼저 떠난 큰딸을 못내 그리다
큰언니를 따라갔다. 평생 남편보다 더 든든한 기둥였던 큰언니의 무너짐을 엄마는
견디지 못했다.
춘 삼월 어느날, 병원에서 완전히 맥이 멈춘 상태로 아들집으로 모셔졌는데
막내가 장지로 내정된 곳을 둘러 보러 갔다가 아직 도착을 못했다. 우린 모두 둘
러앉아 엄마의 육신을 주무르며, 엄마 꼭 막내 보고 가세요,,,결국 엄마는 막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한줄기 눈물을 흘리시고 운명하셨다. 죽음의 문턱에
서조차 막내아들 보겠다는 의지를 관철한 엄마가 놀랍기만하다. 이세상 소풍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는 엄마의 얼굴은 평화롭고 해맑은 소녀처럼 아름다웠다. 소녀때 모습으로
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셨나보다. 어찌나 아름답던지 꼭 천사의 모습이었다.
가녀린 들꽃같던 엄마는 그 누구보다도 외유내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