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우리
2009.08.03 08:28:16 조회632
아버지와 우리
홈피에 글을 올린 탓일까? 일생을 잘못 사신 것 같은 아버지의 영상이 단편적으로 자꾸
떠오른다. 예술가로 사셨어야 했는데, 환경을 잘못 타고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가족들
마저 이해할 수 없는 기인으로 사셨던 아버지란 생각이 요즈음 부쩍 든다.
손재주가 기가 막혔던 아버지,
보름달 달덩이 같은 얼굴인 아버지가 나타나면 동네가 다 훤해졌다는 작은 할머니 말씀도 떠오른다. 내가 봐도 아버진 잘생긴 얼굴였다. 이목구비가 서양인처럼 입체적이고, 짙은 호랑이 눈썹이 특징였다. 골격도 굵고 큼직했다. 힘도 장사였고 목소리도 컸다. 중학교 졸업식때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게리쿠퍼보다 더 잘 생겼다고 어린 마음에도 평가를 했다.중절모자를 꼭 쓰시고 의관을 갖추시고 외출하던 아버지...
겉모습은 멀쩡하셨지만, 속마음은 불가사의한 세계를 사는지 가족들인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한 아버지...특히 엄마가 많은 고통을 감수하며, 평생을 아버지로 인해 자유한번 못누리고 아버지의 노예처럼 사셨다.
아버지는 평소엔 가족들과 깊은 말씀, 다정한 말씀을 별로 안하시다가 술만 잡수시면 그동안 표현이 안되었던 당신의 마음속 응어리를 다 토하셨다. 외계인처럼 혼자 술주정을 하셨다. 거의 안하무인의 폭군같은 아버지의 술주사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웃들도 손을 들고 가까운 파출소 순경들도 타치를 못했다. 원래 그런 양반이란 인식을 주위에다가
완벽하게 각인시킨 아버지.... 물론 큰언니의 활약으로 이웃도, 경찰도 다 이해를 하고 넘어간 것이긴 하지만....
자주는 아니지만 술을 한번 잡수시면, 하루가 아닌 이틀 삼일이 걸린다. 그런 홍역이 없다.
그런데 술에 지치면 아버진 꼼짝않고 누워서 이삼일을 보내신다. 염치가 없으신지 얼굴도 외면하면서.... 그런데 문제는 엄마가 그런 아버지를 너무 잘 보살펴 드린다는 것이다. 해장국부터 아버지의 원기를 돋을 갖가지 음식을 지극 정성으로 해다 바친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몹시 건강하게 평생을 사셨다.
그런 식으로 매사가 돌아가니, 엄마를 원망할 수도, 아버지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으로 이어져 그저 우리 팔자가 그런 가보다 하며, 우리 형제들은 엄청난 인내를 감수하는 체질로 되어 간 듯하다. 고통이 따르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감수할 밖에...
엄마의 말에 의하면 젊어서는 안그러셨단다. 그렇게 자상하고 정이 많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사업체를 형제들에게 넘기고, 상경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일찍 외조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외가댁도 많이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식구보다는 남을 더 챙기시는 성격이 강해서 우리집은 항상 잔치집 처럼 여러 투숙객들과 함께 늘 식사를 했다.시골에서 항상 2-3명은 몇 달씩 우리집에서 기숙을 하다 내려가곤 했다. 아버지는 손님들 대접이 소홀하다 싳으면 단번에 역정을 내셨다. 그러니 엄마가 허리가 휘도록 먹거리를 풍성하게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집은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들처럼 주택이나, 옷거리나, 돈을 모으고 알뜰살뜰 사는 관심이 아니라, 매끼 밥상이 가득해야 했으니, 난 그게 너무 싫어서 책에서 본 정신 세계에 더 몰두한 것 같다. 지금도 너무 잘먹고 사는 것을 싫어한다. 그때 하도 데어서.... 지금 가만히 생각해본다. 어렵던 시절 누구나 배를 많이 곪았던 시절이니 아버지가 그 점에 천착해서 친척들 먹거리에 그렇게 신경을 쓰신 건 아니었을까...T뭐니뭐니 해도 배고픈 설음이 제일 크다는데...그래서 그리 하신 건 아닐까...
아버지는 식복을 타고난 양반이라고 엄마가 늘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집은 이상하게도 의식주 중에서 식에 대한한 남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잘 먹고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덕에 장성하기까지 형제들이 병원을 가본 적이 없다. 식구들 모두 건강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80세 때.
희한한 건 돌아가실 때 비로소 엄마에게 당신땜에 고생 많았으니, 훨훨 날개 달고 자유를 누리다가 7년 후에 아버지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놀랍게도 그 말씀대로 그렇게 되었다. 장례식을 치루면서 우린 깜짝 놀랐다. 여기저기서 달려온 생전 못보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타나 아버지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많이 받았노라고 하면서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난 아버지를 많이 미워했다. 엄마를 너무 고생시켜서 그게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가장 불쌍하게 내몰린 내 엄마를 자식인 내가 구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가슴을 치며 운 적도 있다. 특히 자식중에서 내가 부모님과 한평생을 지낸 탓에 난 아버지의 죽음을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아버지를 모실만큼 가까이서 모셨기에 다른 형제들보다 애달픔은 없었고, 엄마가 이제 그 긴 고통의 시간을 끝내게 된 것에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엄마나 자식들이나 아버지를 끔찍하게 위했기에 아버진 그런 대로 행복하시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고 아버진 내 기억에서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바로 밑의 동생을 찾아갔을 때 난 으악 소릴쳤다. 동생 화실에서 아버지의 초상화가 살아계신듯한 모습으로 날 보고 있었다. 한복에 마고자 까지 입으시고, 단추까지 선명하고, 아버지의 이미지가 살아계실 때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아버진 평생 외로웠어. 아무도 아버질 이해할 수 없었어. 혼자 외롭게 사신거야.” 그림 그리는 남동생이 철학자처럼 그런 말을 하자 나는 너무나 의아해서 남자니까 아버지 편을 드는구나 그리 생각하기만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생각이 요즘 들어 많다. 홈피에 얼핏 가족사를 잠깐 언급하고 나서 계속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래서 불을 끄고 정신을 모아서 아버지를 계속 그려 보았는데, 동생이 말한 것이 옳았구나 하는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가 내 마음속에도 일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나다. 깜장 구두를 선물해주셨고, 크리스마스엔 벙어리 장갑과 털목도리도 사 주셨다. 어릴때 서울 외가댁을 방문할 때면 나를 꼭 데리고 다녔다. 전차를 탔던 기억도 나고, 백화점을 들른 기억도 난다. 어느 추운 겨울에 아버지와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놓치고 다음 차를 기다리며 과일 궤짝으로 불을 피운 정거장에서 동동 거렸던 기억도 난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가 놓친 버스가 수원 어느 쪽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버스를 타고 제일 기억나는 것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나 나무들이 모두 나를 두고 뒤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평생을 아버지와 함께 산 셈이다. 결혼해서도 엄마 아버지가 우리집에 출퇴근 하시며 살림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막내딸의 아들을 끔찍이 위했고 우리 형제가 못받은 정을 내 아들에겐 흠뻑 쏟았다. 언제나 싱글벙글 하시며 귀여워하셨다.난 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셨다. 엄마로부터 받은 예의범절이 어디 가겠는가? 모시고 다니며 구경도 많이 시켜드렸다. 아버지의 요청으로 이모님,고모님, 작은 할머님 등도 함께 모시고 다녔다. 그분들은 나를 너무 고맙게 여기며, 자신의 자식들보다 낫다고 매번 말씀하셨다. 노인분들이 함께 오손도손 즐기시는게 나 또한 즐거웠다.
그 막내딸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야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를 다시 하게 된 것을 아버지는 아실까? 역시 복은 많으시다. 기인으로 사시며 불가사의한 의문 투성이던 아버지를 둘째 아들은 초상화를 그려 헌정했고, 셋째딸은 아버지에 관한 글까지 쓰게 되었으니.....
그뿐 아니라, 여장부 큰언니는 결혼 후에도 계속 부모님과 형제들을 여전히 건사해서 언니집을 기꺼이 부모님께 드리고, 언니는 사업체와 딸린 집을 세를 들어 살았다. 아버지를 닮아 남퍼주기 선수인 둘째 언니는 평생을 부모님과 형제들의 먹거리를 책임졌다. 남동생 셋도 모두 아버지의 술주정을 투정하지 않고 받으며 기꺼이 아버지의 보호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심지어 외가와 친가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형제들에겐 안하무인이던 큰오빠도 아버지만은 깎듯이 모셨다. 언젠가 김수현의 방송 드라마에서 큰오빠 같은 캐릭터를 보고 느낀바 있다. 그 시절엔 집안에 꼭 그런 인물들이 있었던 것 같다. 주위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던 인물은 꼭 형제들에게도 그걸 평생을 요구하며 땡깡을 부리며 사는 것이다. 큰오빠가 그런 인물였다. 아버지의 술주정은 사위와 며느리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단지 막내 사위만은 아버지가 이빠진 호랑이 시절에 들어왔으니, 면죄부를 받긴 했지만....
한가지 의혹이 불쑥 떠오른다. 엄마 곁을 떠난 적이 거의 없던 아버지가 가끔 훌쩍 혼자 어디를 갔다 오신다. 나중에 알고보니 형제들을 순례하시며 용돈을 두둑히 챙기셨다는 것이다. 내가 함께 살아서 알고 있지만 아버지의 용돈은 몇푼 안되는 술값과 내 아들 사탕값이 고작이었는데, 그렇다면 그 돈을 어디다 쓰셨을까?
아버지로 인해 우리 가족사가 어디서 찾아볼 수 없다고 여겨지는 그런 유례없는 수난을 많이 겪었고,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무거운 중압감에 빠져 있긴 했으나 그래도 언젠가는 한번 정리를 해봐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난감하고, 용기도 나지 않아 물건너 간 줄 알았는데, 우연찮게 동문 홈피에서 그 말꼬가 터져 간략하게나마 정리하니 속이 후련하다. 나중에 더세밀하게 파고들어 우리 집안의 불가항력적인 여러 요인들이 빚어낸 결과를에 대해 정리를 다시 해보고 싶다. 지금은 두서없이 내쳐 쓴 글들이지만 다시 손댈 수도 없어 그냥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