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당 연가
2009.07.14 05:23:43 조회809
상아당 연가
강당 앞의 넙대대한 돌층계를 올라 육중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로비와 양쪽으로 위아래 층을 연결하는 계단이 있고,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가면 복도 사이에 특별교실들과 우리들의 교실이 쭉 이어져 있다. 건물구조상 지하지만 1층과 별반 다를바 없는 교실이다.
1년전의 순종적이고 어리버리한 모습은 사라지고 생기발랄한 악동 스타일의 우리들이 교실과 상아당 곳곳을 넘나들며 넘치는 생기를 발산하며 종달새처럼 지지배배 행복해한다.
근심걱정 없는 밝고 환한 그 시절이 내겐 인생의 황금기였다.
조용한 눈빛에 단정한 교복을 입은 애들도 많지만, 바클을 풀어 헤친 채 널널한 옷차림새로 자유를 만끽하는 애들도 많다. 그러나 꿈을 쫒는 우리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푸르른 바다빛이었다. 2-5반 우리 담임 선생님은 남학교에만 쭈욱 계시다가 오신 다리가 무척 날씬 하신 물상 선생님. 호영숙 선생님. 그분의 터프함은 아무도 못말렸다. 작은 체구에 눈엔 장난기가 항상 가득했다.
2-5반 교실엔 10줄의 책상을 배열했는데 앞뒤로 앉은 16번 26번 36번 46번 56번이 모두 장씨였다. 장승자, 장영실, 장석임,장윤정,장귀희 등. 상아당 교실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엔 왁자지껄 시장바닥을 방불케하는 소음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수업종이 울리면 그 소음은 간데없고 태풍전야처럼 갑자기 조용해지며 절간처럼 숙연한 기분마저 들었다.
난 흑백의 콘트라스트 같은 그 소음과 정적에 묘한 스릴을 느끼곤 했다.
수업중에도 가끔 땅이 울리는 폭발적인 웃음이 터졌다. 하긴 낙엽이 굴러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던 시절이었으니...과목도 다양해지고 세계지리, 세게사 등도 배웠는데 지리 선생님의 억양이 특이했다. 도레미파쏠라시도였다. “동남아시아에서는....”우린 속으로 그 음을 따라 하느라 수업은 별로 안중에도 없었다.
특히 내가 좋아한 과목은 세계사시간. 명강의로 소문난 이명옥 선생님. 외모, 판서, 음성, 수업내용이 모두 A였다. 그당시 나는 엄청난 독서량을 과시했는데 선생님의 다음 하실 말씀을 입에서 주렁주렁 내뱉곤했다. 선생님이 받아주시기도 했지만 수업의 맥이 끊어지니 약간 눈살을 찌푸리신 것 같기도 하다. 자제하려 해도 아는 것이 나오면 못참았다.
하여튼 등교길에 큰 책가방과 실내화주머니 외에 서너권의 책을 싼 보따리까지 들고 다녔다. 어제 읽다 만 책과 그 바톤을 이을 책까지 들고서 머릿속엔 온통 읽은 책의 내용에 집중되어 용산 남학생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내 오른뺨쪽을 손으로 꽉 잡으시며 이리저리 흔들었다. 임마! 네가 이번에 전교 1등 먹었어. 1등이고 뭐고 창졸간에 당한 수모에 나는 아무 생각도 안나고 얼굴만 빨개졌다. 여학생의 심리를 너무 모르셨던 선생님. 남학교에선 그런 행동이 아무렇지 않겠지만 여학생인데 그럴 수가.....남학교에선 그런 행동이 비일비재했으니 그 버릇이 내게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학기말에는 성적이 뚝 떨어진다. 에체능 과목에서 점수를 깎이고 들어가서.
담임선생이 터프하니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우리반의 극성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결국 사단이 터졌는데 교내 합창경연대회 준비를 하다가 장난만 치는 애들 때문에 박기훈 음악 선생님이 너무 화가 나셔서 수업을 보이콧하셨다.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에 놀란 우리들이 선생님께 백배사죄하고 열심히 준비를 해서 우리반이 1등을 했다.
“들소들이 뛰고 노루 사슴 노는 그곳에 나의 집 지어주...” ‘언덕위의 집’ 노력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교훈을 절절히 깨달았다. 시행착오를 거쳐서 인생이 성숙된다.실패없는 성공이 어디 있겠는가.하여튼 합창대회에서 1등을 한 후 우리반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쾌조의 급상승세를 보였다.
가을로 접어들자 우리반엔 연일 고사떡 파티가 열렸다. 집에서 고사 지낸 떡을 가져와 같이 먹다보니 거의 한달을 파티를 한 것 같다.
시험이 끝나면 정기적으로 단체 영화관람을 갔다. 대한 극장 등 일류극장만 다니며 숱한 명화를 보았으니 큰 행운이라 여겨진다. 명절때면 볼 수 있는 주옥같은 명화를 전부 다 보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본 영화중에 흑백영화로는 ‘내마음의 행로’ 최초의 칼라 영화로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등이 있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사랑하는 여자를 못알아보던 남자가 마지막 씬에서 기억을 찾아 ‘파우라’하고 외치던 장면은 잊을 수 없다. (파울라는 여주인공 이름) 그 마음의 행로에 등장한 예쁜집과 더불어.
한니발은 알프스산을 넘으며 부상당한 병사들의 상처와 흘린 피가 하얀 눈에 뚝뚝 떨어지는 장면이 너무 선명해서 처음 칼라를 접한 이질감과 괴리감으로 속이 메스껍기도 했다.
방향이 같던 친구와 손을 꼭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학교에서 미군부대 담을 끼고 남영동의 호젓한 뒷골목을 지나 성남극장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철물점이 즐비한 원효로 1가를 거쳐서 용산 경찰서 지나 원효로 2가 집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무대만난 배우처럼 인생에 대한 무궁무진한 열정을 쏟아냈다. 즉 책속의 내용들이 꿈의 세계로 둔갑해서 눈썹휘날리며 열변을 토하게 한 것이다. 그때 일방적인 내 입담을 들어준 친구들이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원효로 3가에 살던 예쁜 미인 김명옥 등이 나의 청중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