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oTalk_20240625_084332610.jpg](/pages/upload/board/m217/2406/25/20240625_6f163fa85df20644e9c230679cf5a447.jpg)
어느 해 6월, 햇살도 뜨겁고 할 일도 많아 집에서 보내기로 했는데 할 일은 반쯤 해놓고
TV에서 방영하는 영화에 빠져 버렸다.
채널을 돌리다 특선 영화 '고지전'이라는 자막을 볼 때만 해도 누가 나오는지만 보고 돌리려 마음먹었다.
신하균, 고수, 유승룡, 류승수, 이제훈....
이 연기파 배우들의 이름을 보고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전쟁영화, 서부영화는 젊은 시절에 많이 봐서 요즘은 관심이 없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채널을 돌리지 않은 것이 스스로 대견했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화관에 가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종종 있었지만 나이 탓일까. 머뭇거리는 사이에 지나쳐버리고 아쉬운 대로 케이블 채널을 통해 영화에 대한 갈증을 풀면 되었다.
그나마 100분 투자하기도 어려워 어쩌다 좋은 영화를 만나지만 시작도, 끝도 놓칠 때가 많았다.
'고지전'을 보면서 모처럼 영화적인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을 맛보았다.
신병 윤상식은 처음에 너무나 순진무구하고 겁이 많아 징징 울던 소년이었다. 그가 고참들의 청에 못 이겨 겨우 부르던 '전선야곡'은 높고 맑은 음색이 오히려 슬펐다.
그러나 몇 번의 전투를 겪은 뒤, 참호에서 제법 느물거리며 몸까지 흔들며 부르는 '전선야곡'은 달랐다.
치열한 전투를 이기지 못하던 또다른 겁쟁이 김수혁(고수)은 친구 강은표(신하균)가 2 년 만에 만났을 때 이미 무섭게 달라져 있었다. 살기 위해 수많은 적들을 죽이고 지옥에 가게 될 거라며 그 지옥 보다 지금의 지옥이 오히려 끔찍하니 차라리 여기가 지옥이라 여길 것이라는 그의 고뇌.
전쟁을 다루되 그 전쟁이 사람을 어떻게 달라지게 하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사선을 같이 넘은 자들의 기묘한 우정과 수없이 뺏고 빼앗기는 고지탈환 작전 과정에 싹튼 적과의 수상한 친밀감.
결코 원하지도 않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에 그들이 보여주는 우정과 용기.
영화는 비장하고 아름다웠다.
친구의 죽음 앞에 보이던 신하균의 눈물은 어찌나 리얼한지 나도 모르게 울컥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참지 못했다.
영화 초반에 북한군 장교 유승룡은 전쟁은 일주일 안에 끝난다고 호언하며 너희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몰라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던졌다.
길고 지루한 전투를 치르며 주인공은 그를 만나서 꼭 묻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둘 다 부대원을 다 잃다시피 한 채 우연히 독대를 하게 된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무엇을 위해 싸웠느냐"
유승룡은 대답한다.
"처음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는데 지금은 너무 오래 되어 잊었다"
그때 들려오는 전쟁 종식의 방송. 둘은 동시에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사람은 눈을 감고, 한 사람은 햇살 쏟아지는 참호 밖으로 허청허청 걸어 나간다.
극한의 공포는 사람의 이성을 말살시키지만 그 가운데도 인간애는 싹튼다는 새삼스러운 인식.
그리고 인간은 평화롭게 살 권리를 가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
더하여 이념이 사람을 지배하고 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엔딩장면 중 하나, 황폐한 애록고지 위에 즐비한 장병들의 시체를 보며
저 죽음들이 있어 오늘이 있게 되었구나 싶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