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글을 읽어보다가 김주일08 선배님께서 쓰신 글에 감동하고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여 다시 올려봅니다.
리마인드 읽기?로 --
아주 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그 또한 감동이었습니다. 선배님들의 수도릴리 홈페이지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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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18살에 결혼하셔서 19살에 큰 언니를 낳으셨고, 29살에 나를 낳으셨다. 37살에 막내 남동생을 끝으로, 꽃다운 39살 나이에 아버지를 홀로 떠나 보내셨다. 아버지는 49살에 젊고 아름다운 아내와 올망, 졸망한 6남매를 이곳에 두고, 한마디 말씀도 못 하시고 아침 출근 하신뒤 돌아오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셨다.
두분은 20년간 짧은 사랑을 하고 떠나셨던것이다. 나의 10살까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어머니가 늘 간직 하셨던 옛날 사진에서 볼수 있었다. 두분은 멋장이셨다. 갖고 계신 사진중에는 아버지가 개업하신 병원 앞에는 병원 조수들과 신식 오토바이와 함께 찍은 누렇게 빛 바랜 사진, 그리고 큰 언니가 5살 쯤의 나이였을 때, 아버지는 흰색 신식 양복과 구두를 신고, 그 옆에, 어머니는 까만 뾰족 구두에 흰색 바탕에 예쁜 수를 놓은 양산을 접어 언니와 세 식구가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있다.
어머니는 가끔씩 아버지의 경의전 (서울 의대의 전신) 졸업 앨범 “형설 기념(螢雪記念)”을 꺼내시어 펴 보시곤 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 큰언니는 아버지 어머니와 행복한 시절이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10살 까지로 막을 내린 것이다. 다만 희미한 기억에서 아버지를 그리며 옛날 옛적에 아버지가 살아오신 사진첩에서 아버지를 만나곤 했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흐르며 잊혀져 갔다.
39살로 홀로된 어머니는 아버지 떠나신 후 신경성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의 몸이 되시었다. 그런 불구의 몸으로 30년을 사시면서, 그 사진첩을 남편처럼 품고 살고 계셨던것이다. 6.25 전쟁 중에 피난길에도 아버지의 사진첩은 품고 다니셨던 것이다. 세상을 떠나시며 그 사진첩은 막내 동생이 간직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남겨 놓으신 유산은 하나도 없었다. 늘 “내 주먹이 든든한데, 돈에 욕심내지 말고 살아요” 하는 아버지의 말씀에 어머니는 늘 섭섭해 하셨다. 주먹만 믿고 있던 당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떠난 후, 6남매 는 가시밭 길을 걸으며 고학이라는 생활고를 안겨 주셨다. 평안북도 갑부의 아들로 고생을 모르셨던 아버지셨다. 물려 받을 재산은 모두 이북에 있었으니… 주먹이 든든하다 하셨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그렇게 버리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홀로 떠나셨던것이다.
‘혼자 개척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는 생활 신조를 갖고 힘들게 살았던 옛날…그러나 훗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두고 가신 “형설 기념” 사진첩은 (서울대학교의 전신 경성의학 전문학교의 앨범) 귀한 가보가 되었다. 형설 기념 사진첩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막내 아들에게 남기고 가셨다. 사진첩 “螢雪 記念” 은 신재의 박사님의 논문에 도움이 되었고, 아버지와 우리 가문의 소개가 머릿말에 올려졌다.
신재의 박사님은 대한 의사학 (醫史學)회장을 지내신 분으로 치의학 박사와 문학 박사 (역사학)이시다
신 재의 박사님의 논문 제목은 …
“1924년 경성 의학 전문학교 졸업생의 민족 의식”
논문 머릿말 중에서…
“이 사진첩은 1924년 경성 의학 전문학교 졸업생의 한 사람인 “김상후(金尙후)의 가문에서 보관 되었던 것이다.
“형설 기념” 사진첩의 소장자는 1924년 경성 의학 전문학교 졸업생의 한사람인 김상후의 후손이다. 김상후의 이름은 그의 부친이 지었다고 한다. 끝의 후(后)에 밑에 토(土)를 만들어 한 글자로 만들었다. (특이한 漢字이기에 자판에는 나오지를 않음) 이것으로 보아 그의 집안은 漢學이 능한 가문으로 추정한다.
김상후는 평안북도 박천에서 현미경과 오토바이를 갖추고 개업한 분이었다. 금석학에 관한 역사에도 조예가 있었고 광복 후에는 “건국 청년회 문화 국장” 을 지내기도 하였다. 김상후의 후손으로 그 아들, 김평일은 치과 의사이다. 또한 이 사진첩은 복사되어 “의학 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다. (중략)
“형설 기념 사진첩은 49쪽으로 구성 되어 있다. 49명의 졸업생이 49쪽의 사진첩을 냈다는 뜻을 담은 의미이다.(일본 학생들과 함께 졸업 했지만 한국 학생만이 뭉쳐서 만든 것이다) 1924년 경성 의학 전문학교 졸업생의 민족 의식을 뚜럿하게 볼 수가 있다.(중략)
1916년 4월 1일 근대 의학 교육 기관의 하나인 경성의학 전문학교는 총독부 의원 의학 강습소에서 분리 개편된 전문 학교이다. 이보다 먼저 1908년 10월 24일 조선 총독부는 일제 강압에 의하여 의학교, 광제원, 대한 적십자 병원을 통합하여 의료 중심의 기관으로 대한 의원을 설립 했고, (조선 총독부 관보 1911년 4월 1일자) 1876년 2월 11일 일본 거류민단을 위한 “제생의원” 이 개원 되었고, 이곳에 1879년 9월 지석영은 서양 의술인 종두법 (種痘法)을 배우기도 했다 …(중략)
1885년, 조선 정부는 기독교 선교사 알렌 (H. N. Allen)과 함께 “백성 보살피기”를 위하여 제중원 (濟衆院)을 설립 하였고, 1886년 3월 29일 제중 의학교를 신설 하게 되었다. 1894년 9월 26일 제중원은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 에비슨(O.R. Avison)에게 운영권이 이관 되었다. 이것은 서세 동점 (西勢東漸)이 조선 총독부에 영향을 준 사례이기도 하였다.조선 총독부의 의학교 필요성은 1896년 12월 <독립 신문>과 1898년 7월 만민 공동회와 1898년 11월 27일 지석영 청원서에서 보여진다.(중략)
조선 정부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조선의 의료기관은 광제원과 대한 적십자사 병원이있었다. 1908년 10월 24일 조선 정부는 일제 강압에 의하여 의료 기관을 통폐합하여 대한 의원을 설립 한 바있다. 이 대한의원에 교육부를 두어 의학 교육을 하였다. 1910년 9월 30일 대한의원이 총독부 의원이 된 후, 1911년 2월 2일 이 총독부의원 교육부는 의학 강습소로 개편된 바 있다.(황성 신문 1908년 11월 15일자) (중략)
경성 의학 전문 학교는 4년제 관립 학교로 연건동에 위치하였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같이 공부하였다. 경성 의학 전문학교의 임상 실습은 1928년 5월28일 총독부 위원이 경성 제국 대학 의학부로 개편 되기까지 총독부 의원에서 실습하였다.
광복 후, 1946년 8월 22일 법령 제102로 “국립 서울대학고 설치에 관한 법령”에 의하여 서울대학교의 의과 대학이 설립시에 경성 의학 전문 학교, 경성 제국 대학이 합쳐서 오늘에 이른다. 경성 의학 전문학교는 부속으로 12년 동안 사용 해 왔던 조선 총독부 의원을 경성 제국 학부 에 내어 주면서 주변으로 밀려 나가게 된다.(중략)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은 오늘에 이른 것이다.
1924년 경성의학 전문학교 졸업생의 “형설 기념 사진첩의 머리말은.....
“식민지 지배 체제의 동화가 아니라 새로운 길의 모색이었다.” 이다. 우리 아버지는 1924년 경성 의학 전문학교 10회 졸업생이시다. 일본인들과 함께 공부 했지만 사진 첩은 위에서 말했듯이 민족 의식을 함께 한, 한국인 49명만 함께한 사진 첩이었다.
글을 올리고 나니, 어머님의 그리움으로 목이 메인다.
불쌍하고 가엾은 내 어머니!
한 세상을 너무도 쓸쓸히 살고 가신 내 어머니…
짧은 남편과의 행복했던 시절을 사진첩에 담아 평생을 사부곡으로 살고 가신
가엾은 내 어머니....
어머니 !
당신은 너무도 훌륭 하셨습니다.
어머님이 계셨기에 어머니의 자식들은 오늘 이렇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또 다시 훌륭 하십니다.
전쟁통에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그 사진첩을 세상 하직 하는날 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그 사진첩이 우리 나라 의학 전문 학생들의 혼을 담은 사진첩으로 세상에 발표 되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와 함께 했던 지난날은 철부지였습니다. 이제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어머니 만나는 날, 저는 어머니 끌어 안고 한없이 울 것입니다. 그때는 꼭
마중을 나오셔야 됩니다.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보고싶습니다.
이 글을 쓰며 어머니의 셋째 딸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불러 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후기: 신재의 박사님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 드립니다.
그리고 축하 드립니다.
김주일
신박사님의 논문중에서 간추려서 부분 부분 올렸습니다. 이 글은 우리 가문의 글이기도 하고,
또 현대 의학사, 또 서울의대 졸업생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올렸습니다.
개인적인 자랑을 하고 싶어서 올린 글은 아닙니다. 양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리자 이신 임중자님께 부탁 말씀 드립니다.
1, 2편에 좋은 음악 올려 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2010-02-04 | 06:17:06
임중자
♬ 쇼팽 / 녹턴 1번 ♬
음악 하나 넣었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잔잔한 음악이 좋을것 같아서...
선배님 가족에 얽힌 소중한 추억과
서울의대 전신에 대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어머님이 남편처럼 소중히 간직하셨던 추억의앨범.
다른분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네요. 축하드립니다.
2010-02-04 | 06:53:40
장석임
주일 선배님!!!
오랜 만에 글 올리셔서 반갑습니다.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선구적이고도 독립심이 강한 애국적 삶을 사셨군요. 한국의 서양 의학사에
족적을 남기실 만큼 훌륭한 분이십니다.
훌륭한 부모님을 두셔서 부럽습니다.
어머님 또한 험한 세상사에도 남편의 훌륭한 뜻을 고히 간직하시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셨으니 신사임당이 부럽지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