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에 관한 생각들
2014.06.30 09:47:00 조회1360
토마토, 뒤집어 읽어도 토마토다. 토마토를 자른다. 붉은 껍질처럼 속도 붉은 색이다.
토마토는 정직한 과일인 게 분명하다.
언젠가 누가 말하기를 여자는 체리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고 물었더니 체리는 겉과 속이 같기 때문이라나.
왜 여자만 그래야 하는데? 아마 그때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그래도 체리를 볼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토마토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체리야 자주 대하는 과일이 아니니까.
누군가는 토마토를 과일이 아니라 채소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과일로 대접 받는다.
굳이 채소다 과일이다 분류할 필요는 없다. 과일이건 채소건 몸에 이롭다는 데에 토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즐겨 먹고 안 먹고는 각자의 기호에 달렸다.
몸에 좋다고 찾아 먹고, 나쁘다고 멀리 하며 살아본 적은 없다. 그래도 토마토는 즐겨먹어 보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
암만 해도 그 맛에 익숙해지지가 않아서다.
토마토는 그러나 늘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곤 한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사철 봄바람이 일던 행복했던 때의 이야기다.
우리집은 뜰보다 꽃밭이, 꽃밭보다 채마밭이 훨씬 넓었다. 꽃밭은 물론 100여 평 되는 그 너른 채마밭을 아버지 혼자 다 가꾸셨다.
유난히 정성을 들이는 것으로, 꽃밭에서는 장미였고 채마밭에서는 여름철 토마토가 아니었나 싶다.
파랗던 토마토의 색깔이 붉게 물들면 우리집 깊은 우물로 날마다 토마토들의 입수가 시작되곤 했다.
퐁당 퐁당...
우물 속으로 그것을 던져 넣을 때의 즐거움은 어린 우리들의 몫이었다.
(그리운 생각이 가파르게 밀려든다. 그 우물,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르고 부엌문을 열고 나온 엄마가 키질을 하기도 하고
쌀을 씻어 뽀얀 뜨물을 받기도 하고 야채를 씻던 정경들이 환히 떠오른다)
저녁밥상이 차려지면 두레박으로 건져낸 토마토를 엄마는 얇게 저며 파란 유리 접시에 가득 담아 상에 올렸다.
전이 넓게 퍼졌으면서도 안이 오긋한 유리 접시는 세공이 아름다워서 붉은 토마토가 담긴 모습이 너무나 먹음직스러웠다.
식구들은 토마토를 밥에 얹어 소금으로 간을 해서 비벼 먹었다.
어린 나는 그 맛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다른 식구들은 정말이지 맛있게 드셨다.
토마토를 밥에 비벼먹는다고 하면 모두 의아해 한다.
어쩌면 우리 가족만 공유할 수 있는 맛의 추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엄마도 아버지도 그리고 언니도 이 세상에 없다.
토마토 먹는 일이 내게 과제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또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몇 가지 기억을 늘 잊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담임이신 김희경선생님은 당시 아주 건강하고 유쾌한 처녀 선생님이었는데 우리의 선배이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토마토 예찬론자였다. 몸이 약했는데 토마토를 많이 먹어 그처럼 건강하다며 우리에게 권하곤 하셨다.
그후 토마토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늘 놓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토마토와 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짭짜리라는 품종의 토마토를 먹어보니 맛이 특별했다.
대저라고도 하는데 간척지에서 자란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맛볼 수 있는 기간은 아주 짧다.
어제 경기도 광주에 계신 목사님이 토마토 한 상자를 주고 가셨다.
상자에는 '벌이 키운 토마토'라 쓰여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입 베어물자 아니? 싶었다.
짭짜리 말고 이렇게 풍미가 있는 토마토는 처음이었다. 토마토가 심지어 달다는 느낌까지...
그런데 이것도 생산되는 시기가 잠깐인 듯 하다.
그리움을 위하여, 건강을 생각해서 토마토를 자주 먹고 싶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잘라놓은 토마토의 빈틈없이 꽉 찬 붉은 속살이 오지고 탐스럽다. 접시 바닥에 금방 고이는 과즙도 먹음직스럽다.
올 여름에는 겉과 속이 같은 토마토를 먹으면서 내 영혼의 빈 뜨락도 토마토처럼 꽉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