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야기 하나 해줄까? 뭐냐면, 가끔 하는 나의 착각에 대한 거야. 내가 사람인 줄 안다는 거지. 그게 아마 그 광경을 봤던 날부터 증상이 더 심해지지 않았나 싶어. 그날 이야기 좀 들어 보겠어?
오십 년만의 추위라고 모두 떠들어대던 날 새벽, 한 시쯤 되었을까. 추위는 그때가 절정이니 이제 별 일은 없겠지 하고 막 마음을 놓으려는 참이었지. 그런데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거야. 그 시간에 텅 빈 주차장에는 왜 오는 것일까. 수상했지. 그런데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봐서 밤손님은 아니고 취객 같더군. 늘 드나들던 낯익은 얼굴도 아니었어,
그런데 이 사람 보게, 차단기 막대를 두 손으로 움켜잡는 거야. 그러더니 마구 흔들기 시작하겠지. 점멸등이 어둠을 가르며 지그재그로 춤을 추었어. 두 손으로 꺾어 봐도 안 되자 땅바닥에 잡아 누르더니 발로 지끈지끈 밟는 거야. 그게 보기보다 값이 꽤 나간다는데 말릴 방법이 있어야지. 그럴 때는 붙박이 신세가 여간 답답한 게 아니더라고. 소리라도 지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다행히 웬 여자가 황급히 달려와 남자를 말리는데 어림없었지. 뒤에서 잡아당기다가 팔을 잡아채 봐도 소용없던 걸. 남자는 점점 더 광포해졌어. 말리던 여인을 냅다 팽개쳐 땅바닥에 처박아 버렸는데, 차디찬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여자, 괜찮았을까. 쯧쯧, 그새 차단기 막대는 기어이 절단 나고 말았지. 취중이라 그런지 힘이 장사였어. 기억자로 꺾여버리더군. 그제야 성이 좀 풀리셨는지, 맞은 편 골목으로 비칠비칠 걸어가는 거야. 겨우 일어선 여자도 뒤따라가는 걸 보아 그의 아내였나 봐. 속이 많이 상한 눈치였어.
그러자, 어디서 들었나, 엉뚱하게 동키호테라는 사람이 떠오르는 거야. 저 남자, 혹시 그가 빙의되었나? 그렇다면 차단기는 그에게 풍차의 날개였단 말이지. 물론 당치도 않지만 별별 일이 다 벌어지는 세상사를 보고 있노라면 어울리지도 않게 생각이 많아지곤 해.
형편없이 망가진 차단기를 보고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일. 다음 날, 당장 조사가 시작되었지. 내 회로에 담긴 장면을 돌려보며 누군지 찾아내려 했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았어. 이른 새벽의 그 남자, 그 순간에 지켜보던 눈 같은 건 염두에 두지도 않았겠지.
하긴 누가 있건 없건 그는 일을 저질렀을 거야.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 그가 차단기와 씨름할 때 언뜻 보였던 울분과 외로움을 떠올리면 그나마 그를 살린 건 지난 밤 일이 아닌가 싶었어. 그렇게 풀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어느 길모퉁이에 쓰러지기라도 했더라면 동사하고 말았을 테니까.
추위에 떨며 불침번을 섰던 새벽의 일을 생각하면 그가 잡혀야 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비틀거리며 사라지던 그의 초라한 뒷모습을 떠올리면 웬일인지 잡히지 말았으면 싶기도 하더군.
내 시야는 골목 어귀까지. 막상 어느 집으로 갔는지 찾을 수 없어 조사는 벽에 부딪치고 말았어. 할 일을 다 했지만 이럴 때는 속수무책. 경찰에서는 그런 조그만 사건 같은 건 수사하기 힘들다고 한다네. 그대로 끝나버리는 줄 알았어.
그런데 뜻밖에 그 남자가 제 발로 찾아와 이실직고를 하는 거야. 환한 낮에 본 그 사람은 의외로 얌전한 생김새에 차라리 소심하고 불쌍해 보이지 뭐야. 내 주제에 마음이 짠해졌다면 코웃음 칠지 모르지만 정말 그랬어. 차라리 그때 내가 눈을 감아버렸더라면 싶기도 하고.
쳐부수고 싶은 대상으로서, 차단기가 풍차의 날개와 같았는지 몰라도 그에게 동키호테적 낭만은 없었다는 점이 달랐지. 어쩌면 차단기는 그가 부딪친 삶의 울분이나 절망에 다름 아니었던 건 아닐까. 새벽의 기세로 봐서 내 추측이 틀림없어.
꼭 들어가야만 하는데 눈앞에서 철커덕 닫혀버리는 문 앞에 서본 적이 있으신가? 새벽의 차단기가 홧술을 마신 그의 눈에 깨부수고 싶은 삶의 장벽으로 보였을지 누가 알겠어. 하지만 화(火)는 화(禍)를 부른다고 그 불쌍한 사람은 결국 차단기 값을 물어내야 했지. 그 돈 마련하기도 힘든지 며칠 걸린 것 같더라고.
이번에는 그렇게 일이 풀렸지만 뻔히 보면서도 별 수 없이 당하는 일도 많아. 그러고 보면 내 역할의 한계는 어쩔 수가 없더군. 물론 나로 인해 해결되는 일도 많다지만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게 여간 복장 터지는 게 아니더라고. 그래서 엉뚱한 생각 한 번 해봤어.
성형외과 의사들을 의느님이라고 부른다면서? 조물주가 만든 얼굴보다 더 잘 고쳐줘서 그런다나 어쩐다나. 이참에 내게도 신묘한 기능을 더해 주면 어떨까. 맘보 나쁜 누군가가 일을 저지르려는 순간, 벼락같은 경고음으로 놀라 도망치게 한다든지 여차하면 오랏줄을 날린다거나 물대포라도 쏴서 꼼짝 못하게 붙들어 놓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내게도 이름 하나 붙을까? C느님이라고. 아니 카느님이 좋겠다. 점점 사람 흉내를 내려 들다니 언감생심, 이쯤해서 주제파악을 해야겠지. 그런데 좀 불공평하네. 의느님은 말이 되고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해? 진화하고 싶은 욕심이 뭐 나를 위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계간 문예바다 여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