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 두 뼘 남짓, 좁은 네모 칸은 답답해 보인다. 봉해진 유리문에 오천 원짜리 조그만 꽃다발을 비스듬히 붙여놓는다. 살아 있는 내가 전할 수 있는 마음은 고작 그뿐이라니. 혼잣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네모 안, 작은 액자 속의 언니는 여전히 웃고 있다.
이곳에 오면 쉬이 떠나지 못한다. 넓고 호젓한 경내는 조경이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느낄 수가 없다. 오히려 잠들어 있는 이들이 편안해 보인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실려 침묵의 사연들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연두색 수양버들 가지가 수면을 스칠 듯 흔들리는 모습은 유현하기만 하다.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게 눕고 있다. 그만 가야지. 마음을 갈무리한다. 언니에게도, 그곳에 잠든 모든 이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보낸다.
도로 양편으로 메타세콰이어가 줄지어 솟아있는 길을 걷는다. 한쪽은 개울이 흐르고 맞은편은 산의 절개 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산을 끼고 걷는다. 절벽 중턱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절정의 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본다. 순간 눈에 들어오는 낡은 돌비석 하나. 봉분은 옮겨갔는지 튀어나온 바위 언저리에 홀로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새겨진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발돋움을 하고 읽는다. 아!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탄성. '영원한 안해 李姬0’
덤불에 가려 나머지 한 글자를 읽을 수 없다. ‘璟’인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 ‘영원’도 그렇지만 ‘안해’라는 예스러운 단어가 유독 가슴을 친다. 이 글을 새긴 사람은 누구일까. 모르긴 해도 손수 새겼을 것만 같은 비문. 마모된 모서리가 수없이 스쳐간 풍상을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그분도 영원한 안해 곁으로 간 지 이미 오래되었으리라.
거친 표면을 쓰다듬으며 직접 돌에 한 자 한 자 글을 새기고 있었을 그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구부정한 등이 울고 있지나 않았을까. 글자 하나마다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애통함과 간절함을 다 쏟아 부었을 것이다. 코끝이 찡하다. 섬약하고 고운 안해를 두었던 다감하고 우직한 한 남자가 그려진다. 어쩐지 문학을 아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누군가의 ‘영원한 안해’였던 행복한 한 여인을 떠올려본다, 생과 사도 나눌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 아닐까. 혼자 생각에 혼자 겨워 한참을 머문다. 붉은 진달래꽃 덤불 위로 스치듯 비끼는 햇살, 눈이 시리다. 문득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봄날이 저물고 있다.
(에세이문학 여름호 ‘길에서 줍다’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