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들 답답하시죠.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집콕의 시간이 늘어나고 있네요.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면서 지나간 일들을 돌이 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할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집에 펌프를 설치하였다. 손잡이를 잡고 아래위로 움직이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펌프가 몹시 신기했다. 나는 매일 펌프에 매달려 놀았다. 그날도 나는 아침부터 펌프 손잡이를 잡고 물을 퍼 올리려 애를 쓰다가 푹 주저앉아 버렸다. 아무리 일으켜도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고 일어서지 못했다.
처음에는 금방 회복하려니 했지만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외과, 내과, 한의원 모두 다녔지만, 허약체질에 과로(펌프에 매달려 노느라) 탓 같다는 추측만 할 뿐 뚜렷한 처방은 내리지 못했다.
엄마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다섯 살에 앉은뱅이 딸이 되었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 아버지는 일상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버지 회사가 있는 읍에서 살고 있었고, 할머니는 같은 밀양이지만 논과 밭이 있는 고향 집에서 살고 계셨다.
소식을 들은 할머니가 달려오셨다.
할머니는 병원 외에도 온갖 민간요법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셨다. 도축장으로 직접 가셔서 약으로 먹일 신선한 소의 간을 사 오시기도 하시고 토끼처럼 깡충깡충 잘 뛰어다니라고 토끼 고기를 고아 주시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약이 될 법한 것은 모두 먹은 것 같다.
누군가가 박하가 좋다는 말을 하였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박하 잎을 구해오시다 나중에 우리 집 뒤뜰에 박하를 직접 심으셨다.
초록빛 박하즙은 양이 많으면 검푸른 색이 되어 먹물처럼 보였고, 박하 특유의 싸한 맛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다. 한 사발의 박하즙을 들고 어린 내가 마셔내지 못할까 안절부절못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생각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두 다리를 딛고 일어섰다. 박하즙을 열심히 먹은 덕인지, 그간의 이런저런 치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자, 할머니는 나를 자랑스럽게 앞장세우고 온 동네에 떡을 돌리셨다.
내가 열네 살 때 우리 집은 서울로 이사 왔다.
그해 가을, 내가 펌프 옆에서 주저앉은 것처럼 할머니는 수돗가에서 쓰러지셨다. 처음에는 곧 일어나시려니 했는데, 그대로 병상에 누우셨다. 뇌졸중이셨다.
1960년대의 뇌졸중 환자는 집에서 대소변을 다 받아내어야 했고 기저귀를 빨아서 사용했었다.
아버지는 무매(無妹)독자셨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두분 모두 건강하셨건만 자식은 아들 하나밖에 얻지 못하셨다. 할머니를 돌봐드릴 사람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준수한 외모의 수재였던 아버지는 명문가 엘리트 사위였다. 겨울이면 방안에서 더운물로 세수했다던 대지주의 딸인 엄마는 식모가 없으면 집안 살림은 엉망이었다. 흔하던 식모는 산업화 따라 점점 귀해졌고, 어른 기저귀를 빨아야 하는 집에서 일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물론 엄마도 할머니의 병 수발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할머니 방에서는 똥오줌 냄새가 진동했고, 할머니는 매일 우셨다.
나는 배은망덕했다.
대문 밖에까지 들리는 할머니 울음소리가 창피했고, 동네 사람들이 난처해했던 할머니 방 냄새도 창피했다.
나는 할머니 방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그렇게 3년을 병상에 계시다 가셨다.
차츰 철이 들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살아가면서 할머니가 생각났다. 하나씩 기억이 살아나면서 말할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때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간절히 기원할 때가 있다.
그토록 창피하고 냄새났던 병상의 할머니를 지금의 내가 모실 수만 있다면 하는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