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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하[立夏]
초하, 初夏
곡우와 소만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 양력 5월 5~6일 무렵이다. 태양의 황경이 45°이며,
이때부터 여름이 시작된다. 농작물이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하며, 해충이 늘어나고 잡초가
우거져 농가 일손이 바빠진다. 보리가 익어가서 추수를 기다리는 철이기도 하다. → 절기.
개념용어
생활/민속·인류
24절기 중 일곱 번째 날로 곡우(穀雨)와 소만(小滿) 사이에 있는 절기. 24절기는 기본적으로
태양의 궤도인 황도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정해지므로 양력 날짜에 연동된다. 입하는 태양의
황경이 45°인 날로 대개 5월 5일이나 6일이다. '입하'는 여름이 들어섰다는 의미이다.
이 무렵은 봄빛이 완전히 물러나고 산과 들의 나무잎이 무성해지며, 농사 일이 바빠지고
개구리와 지렁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이다. → 절기
'입하'라는 말은 여름이 들어섰다는 뜻이다. 입하가 있는 음력 4월을 초여름이라는 뜻의
'초하(初夏)'와 '유하(維夏)', 홰나무꽃이 핀다고 하여 '괴하(槐夏)'라고도 하고,
'보리가 익을 무렵'이라는 뜻으로 '맥추(麥秋)', '맥량(麥凉)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전통의학서인 (기원전 475~221)에 계절의 변화와 인간의 삶에 대해 언급된 이래,
당나라의 역사서인 (945), 원나라의 (1281) 등 여러 문헌에 곡우 기간을 5일 단위로
3후로 구분하고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초후(初候)에는 청개구리가 짝을 찾아 울고, 중후(中候)에는 지렁이가
땅에서 나오며, 말후(末候)에는 주먹참외의 싹이 튼다. 입하 기간에 대한 이런 묘사가 조선 초
이순지(李純之) 등이 펴낸 (1444) 등 한국의 여러 문헌에도 인용되고 있는데, 중국 문헌의
절기는 주(周)나라 때 화북(華北, 지금의 화베이 지방으로 베이징과 텐진이 있는 지역) 지방의
기후가 바탕이 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각 지역 기후와는 차이가 있다.
<풍속>
중국에서는 입하 전후에 앵두가 익고 죽순이 올라오며 새로 나온 과일과 채소들이 많아
몸을 보신하는 시절이라고 보았다. 삶은 계란을 먹으면 심장이 튼튼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죽순을 먹으면 다리가 튼튼해지고, 완두콩을 먹으면 눈이 맑아진다고 믿어, 완두콩을 넣어
찹쌀밥을 지어 먹고, 삶은 계란과 죽순을 넣은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한국에서는 입하 무렵 이미 한낮에는 여름 기운이 느껴지고, 신록이 짙어지며, 개구리가
짝을 찾아 울기 시작한다. 못자리에는 벼의 싹이 터서 쑥쑥 자라고, 보리이삭들은 익기 시작하여
추수를 기다리는 시절이다. 이 무렵 어린 쑥을 뜯어 쌀가루와 섞어서 쑥버무리를 해먹는다.
입하 전후에 수확한 차를 '두물머리'라고 하는데, 보통 우전차라고 하여 곡우 전에 첫물로 딴
차를 상품으로 치지만,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艸衣)선사는 입하(立夏) 전후의 차가 더
상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농촌에서는 이 무렵 잡초가 무성하게 올라오고 해충이 번지기 시작하여 농사일이 바빠지는데,
여름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 종종 있어, 농촌에서는 비를 가리기 위해 짚이나 풀로 촘촘하게 엮은
도롱이를 만들어 우비처럼 걸쳤고, 대오리나 갈대를 엮어 삿갓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중 '사월령(음력이므로 대체로 양력
5월 무렵에 해당)'에 입하, 소만 절기에 대한 당시 농촌 풍습이 전한다.
<4월령>
사월이라 맹하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비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청화하다
떡갈잎 펴질 때에 뻐국새 자로 울고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난다
농사도 한창이요 잠논도 방장이라
남녀노소 골몰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대사립을 녹읍에 닫았도다
면화를 많이 갈소 방적의 군본이라
수수 동부 녹두 참깨 부룩을 적게 하소
무논을 써을이고 이른 모 내어 보세
농량이 부족하니 환자 타 보태리라
한잠 자고 이는 누에 하루도 열두 밥을
밤낮을 쉬지 말고 부지런히 먹이리라
뽕 따는 아이들아 훗그루 보아 하여
고목은 가지 찍고 햇잎은 제쳐 따소
찔레꼿 만발하니 적은 가물 없을소냐
이 때를 승시하여 나 할 일 생각하소
도랑쳐 수도 내고 우루쳐 개와 하여
음우를 방비하면 훗근심 더 없나니
봄나이 필무명을 이 때에 마전하고
메 모시 형세대로 여름옷 지어 두소
벌통에 새끼 나니 새 통에 받으리라
천만이 일심하여 봉와을 옹위하니
꿀 먹기도 하려니와 군자 분의 깨닫도다
파일에 현등함은 산촌에 불긴하니
느티떡 콩찐이는 제 때의 별미로다
앞내에 물이 주니 천렵을 하여 보세
해 길고 잔풍하니 오늘 놀이 잘 되겠다
벽계수 백사장을 굽이굽이 남았구나
촉고를 둘러 치고 은린 옥척 후려 내어
반석에 노구 걸고 솟구쳐 끓여 내니
팔진미 오후청을 이 맛과 바꿀소냐
♩♪♬~ River flowers in yo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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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정[伴鷗亭]과 황희선생유적지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로85번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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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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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정]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1983.09.19 지정), [황희선생영당지] 경기도 기념물 제29호(1976.08.27 지정)
반구정은 고려말에서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임금을 보필하고 89세로 장수하였던 청백리 '황희정승이
말년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갈매기를벗 삼아 지낸 곳으로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세워진 정자이다.
바로 윗쪽에 앙지대(仰止臺)가 있다. 분단의 현실을 체감할 수 있는 철조망이 반구정 언덕과 임진강을 가로 막아
낙조가 들면 더없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허목(許穆)의 반구정기(伴鷗亭記)에
"조수때마다 백구가 강위로 몰려들어 모래사장 벌판에 가득하다" 고 하였다. 1452년 황희정승이 세상을 떠나자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방촌영당과 제사를 지내는 경모재가 구역 내에 있으며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상주의 옥동서원과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되고 있으며 황희 정승의 묘는 반구정에서
문산쪽으로 가다가 탄현면 금승리 산능선에 있다. 황희 정승은 좌천, 파직, 귀양살이 등을 당하면서도 60년간의
관직생활을 통해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돕는 등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참고문헌>
파주 문화관광 http://tour.paju.go.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내용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2021년 4월 27일, 파주 반구정(伴鷗亭) 황희정승 유적지에서.